쳐다만 봐도 좋은 여자가 되고 싶다, 여든이 넘어서도…

나의버킷리스트③ 작가성수선

작년 여름 토요일 아침, 청량리역에서 춘천 가는 기차를 탔다. 대학 시절 MT에서 밤 하늘을 보며 〈별 이 진다네〉를 함 께 불렀던 곳, 회사 생활을 하며 답답할 때면 아무 계획 없이 훌쩍 떠나곤 하던 곳, 이름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곳, 춘천. 곧 사라질 것들은 애잔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곧 추억 속으로 사라질, 몇 달 후면 복선 지하철로 대체될 운명의 ‘춘천 가는 기차’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우리를 춘천으로 데려다줬고, 자연결핍증에 시달리던 친구와 나는 소양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로 향했다. 15분 남짓한 뱃길이었지만, 탁 트인 소양강을 가로지르는 기분 좋은 물살을 바라보니 가슴이 다 후련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청평사에 도착해서 참선이라도 하며 경건하게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때는 여름이었다. 정 오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햇살은 뜨거웠고, 선착장에서 청평사로 올라가는 길은 저질 체력 탓인지 멀고 힘들었다. 반 쯤 갔을까. 얼굴에는 두껍게 바른 자외선 차단제를 뚫고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막의 여행자가 오아시스 앞에 서 멈춰 서듯, 우리는 시원한 나무 그늘과 막걸리가 있는 야외 주점 앞에 멈춰 섰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술은 낮술 이라는 말대로, 더위 속에서 마시는 한낮의 막걸리는 환상 이었다.

그 때, 우리 옆 평상에서 호탕한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여든은 훌쩍 넘은 것 같은 노부부가 잡어매운 탕을 안주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메리야스 차림의 할아버지와 비녀를 꽂은 할머니는 목청 좋게 “좋~다!”를 외치며 소주잔 을 기울였다. 평상에는 빈 소주병이 이미 두 병이나 있었는데, 그 호탕한 기세로 보아 소주 두세 병은 가 뿐히 더 마실 것 같았다. 이도 튼튼하신지 매운탕에 든 잡어도 뼈째 드셨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좋~다!”를 연발하셨고, 50년도 넘게 같이 사셨을 텐데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잠시도 먼 산을 보시지 않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는 소녀처럼 할머니는 수다를 떠시고, 할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껄껄 웃으시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10년 넘게 영업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누군가가 그토록 행복해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내게도 소망이 생겼다. 먼 훗날, 여든이 되었을 때, 이 자리에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낸 춘천에서, 세월을 나누어 온, 함께 늙어가는 내 남자와 “좋~다!”를 외치며 소주를 마시고 싶다고. 함께 씹고 뜯고 마시고 즐기고 싶다고. 시시한 얘기와 소소한 기쁨을 함께 하며 늙어가고 싶다고. 여든이 넘어서도 쳐다만 봐도 좋은 여자로 남고 싶다고. 성공한 할머니보다 행복한 할머니, 존경받는 할머니보다 사랑받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여든이 넘어서도 소주 몇 병을 거뜬히 비우기 위해 나는 오늘도 운동을 한다. 함께 씹고 뜯고 마시고 즐길 남자를 기 다리며.

그림 : 배진성

글 : 성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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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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