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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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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0

[동규루의 오프닝 멘트]
청소년 시절부터 국가 공안국으로부터 '오음 신리쿄'(한국명 오음 진리교)에 대한 스파이활동을 강요받아온 일본 여성 기타가와 가즈미(29)씨가 절박한 심정으로 북에 망명신청을 하다 결국 불법적으로 입국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북조선계 재일교포단체인 '조총련'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요. 과연 어떤 사연일지. 그 내용을 한 번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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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지난 8월말 망명을 신청한 기타가와 가즈미라는 여성이 일본 공안조사청의 부탁을 받고 오음 신리쿄와 조총련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타가와 가즈미 씨의 망명 동기 등에 관해 도쿄지국의 채명석 기자가 자세한 소식 전합니다.

북한 관영 중앙통신은 지난달 28일 일본 여성 1명이 제3국에서 관광여행 중 북한에 불법 입국해 망명을 요청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요도호 납치 실행 범들이 북한에 망명한 이래 일본인이 북한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일본 국내의 큰 관심을 끌어 왔습니다.

일본언론들의 추적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말 북한에 망명을 신청한 여성은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올해 29살의 기타가와 가즈미라는 기혼 여성으로 밝혀졌습니다. 기타가와 씨는 20대 초반에 중국인 남성과 결혼해 오사카 시내의 원 룸에 거주해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북한 관영 중앙통신과 일본언론들이 보도한 대로 기타가와 씨가 북한당국으로부터 수차례 망명 신청을 거부당한 후 지난 8월말 두만강에 뛰어들어 북한에 망명을 신청했다면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냐는 의문이 따릅니다. 일본인 납치 사건이 불거진 이후 일본 국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나쁜 이미지만 크게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기타가와 씨가 공안 조사청의 부탁을 받고 오음 신리쿄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했었다는 일본언론들의 보도가 기타가와 씨의 망명 동기를 풀어주는 하나의 단서입니다.

일본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기타가와 씨는 지하철 살인사건을 일으킨 신흥종교 오음 신리쿄에 96년1월 입단하게 됩니다. 그 직후 가타가와 씨는 필로폰 사용 죄로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일본 공안조사청은 이런 경력을 갖고 있는 기타가와 씨에게 97년 여름 경 접근해 오음 신리쿄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해줄 것을 강요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기타가와 씨는 공안조사청 요원들의 강요에 못 이겨 스파이 활동을 수락하고 2001년 여름까지 오음 신리쿄 ,그 후 아레프로 개명한 교단에 대한 내부활동을 염탐해 정기적으로 공안조사청에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공안조사청 요원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기타가와씨는 이 문제가 공개되고 알력이 격화되자 아레프 교단을 탈퇴함과 동시에 공안조사청과의 관계도 단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기타가와 씨는 공안조사청의 부탁을 받고 조총련에 대한 스파이 활동도 펼쳐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기타가와 씨는 조총련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역으로 북한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됐고 일본 공안조사청과의 관계를 완전 단절하기 위해서 일본을 탈출해 북한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라고 일본언론들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기타가와 씨는 2년 전 포커스라는 주간지에 "나는 육체적 생명보다는 사회적 생명이나 정치적 생명을 중시하고 싶다.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노예는 되고 싶지 않다. 일본에 공헌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수기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이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기타가와 씨는 북한으로 건너 간 후 일본의 친지에게 10월5일까지 다섯차례 편지를 보내온 것으로 밝혀졌으며, 10월5자 편지에는 "이달 2일 이쪽 사람들에게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그가 과연 애시당초부터 북한에 정식으로 망명할 의사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조차 들게 합니다.

기타가와씨는 또 북한으로 8월24일 건너간 후 27일부터 평양의 호텔에서 여성 안내원 동무와 24시간 생활을 함께 하고 있다고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베이징의 일본대사관이 북한 대사관을 통해 신원조회를 의뢰해 왔으나 6일 현재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는 상태라고 아사히 신문이 7일 보도했습니다.

일부보도대로 가타가와 씨가 일본 공안조사청의 부탁을 받고 오음 신리쿄뿐 아니라 조총련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해 온 전력이 있다면 기타가와 씨 망명 사건의 파장이 간단히 수습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도쿄에서 RFA 채명석입니다.
© 2004 Radio Free Asia

http://www.rfa.org/korean/in_focus/120186-200311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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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기타가와 씨는 공안조사청의 부탁을 받고 조총련에 대한 스파이 활동도 펼쳐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기타가와 씨는 조총련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역으로 북한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됐고 일본 공안조사청과의 관계를 완전 단절하기 위해서 일본을 탈출해 북한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라고 일본언론들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기타가와 씨는 2년 전 포커스라는 주간지에 "​나는 육체적 생명보다는 사회적 생명이나 정치적 생명을 중시하고 ​싶다.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노예는 되고 싶지 않다. 일본에 공헌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수기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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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규루의 마무리 코멘트]
위 기사에서 발췌한 두 문단, 특히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에서 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요.
기타가와씨 또한 체제와 이념경쟁이 낳은 한 명의 희생양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기타가와 가즈미 씨. 부디 북한에 망명이 받아들여져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네요.(프랑스나 캐나다 등으로 갔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 것 같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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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서향만당 21]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03.04.21 15:12l최종 업데이트 03.04.30 14:20l



홍세화 |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파리 생활을 시작했던 홍세화. 남민전 사건으로 뜻하지 않은 타국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 근 20년만에 귀국,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다시 서울땅을 밟은 지 23년, 그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0년 겨울 서울 신림동 어느 카페에서였다. 영구 귀국을 앞두고 잠시 귀국했을 때 있었던 강연회였는데, 그는 ‘사회귀족’이라는 새로운 말을 써가며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가 말하는 사회귀족의 의미가 그리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새로운 개념이었던데다가 그걸 이해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그로부터 2년 4개월이 흐른 지금, 카페 ‘미네르바의 부엉이’에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했던 ‘사회귀족’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에 대한 설명과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보는 책을 접했다. 전작들처럼 한겨레신문사를 통해 나온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 그것.

신문 칼럼이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 그의 글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우리 현실을 프랑스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대안을 찾는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 점이 홍세화의 글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일텐데,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짚고 그 대안을 찾을 때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 등을 비교 대상으로 꼽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관련
기사
"한국은 민주공화국 아닌 사회귀족 공화국"


그렇다고 단순히 비교 대상만 프랑스로 바뀐 것은 아니다. 홍세화는 석박사 학위를 따러 유학 간 것도 아니요, 뭐 거창한 사업한답시고 유럽까지 간 것이 아니다.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발령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다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입국할 수 없어, 결국 원치 않은(?) 이국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마땅한 능력도 없고 프랑스어조차 능숙치 않았던 그였기에 결국 운전면허증 밖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머지 택시운전을 하며 빠리 시내를 누볐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한국에서는 소위 ‘KS마크(경기고+서울대)’를 따면 출세가 보장된다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는 그저 ‘또 한 명의 외국인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귀족, 그 ‘찬란한’ 이름이여 !

이 책이 나온 것은 지난 2002년 12월 말. 이미 넉달이나 지났다. “언제 한번 봐야지” 하면서도 짬을 내지 못하던 차에 책을 구입, 하룻밤 새 모두 읽어 버렸다. 짬이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던 순간이었다. 책을 읽는 데는 하룻밤으로 충분했지만 그의 생각을 곱씹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몇 곱절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 이 책에서 홍세화는 호남 차별이나 노동자 연대, 국가주의 교육 등 그야말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제 문제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사진은 홍세화의 비판 대상 중 하나인 <조선일보>.
ⓒ 조선일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은 전작들처럼 <조선일보>나 호남 차별, 노동자 연대, 국가주의 교육 등 그야말로 한국 사회의 제문제를 포괄하는 책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스펙트럼이 넓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듯도 하다. 그러나 찬찬히 책을 읽다보면 근저에 한국판 귀족 ‘사회귀족’의 온갖 추악한 폐습과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우리네 ‘사회성 없음’을 질타하고 있는 듯 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홍세화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부르디외가 말한 ‘국가귀족’이 있는 반면 한국에는 ‘사회귀족’이 있는데,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의 국가귀족은 국립행정학교(ENA) 출신들로 주로 정관계와 국영기업체의 장(長)을 일컫는 반면, 한국의 사회귀족은 말 그대로 정관계나 재계는 물론, 학계와 언론계, 문화예술계, 문단, 종교계 등 (홍세화에 의하면 뭘 지도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불리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범위도 범위지만 프랑스 국가귀족의 경우에는 주로 공공기관에 한정되어 있어 언론이나 학계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고 통칭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불리는 사회적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반면, 한국판 귀족은 그저 자기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부의 사회환원이나 부정부패 등에 대해 올곧은 소리를 내는 등의 ‘사회적 책무’는 그네들 사전에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족이란 신분이 종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는 경향마저 보인다는 데 대해 홍세화는 다시금 아연실색하고 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

그러나 택시운전사는 그저 힘없이 절망만 하지는 않는다. 사회귀족의 든든한 성채를 깨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교육을 통한 계몽이 필요하지만, 중단기적 방안으로서 풍자.고발 문화의 대중화와 실명 비판 강화, 그리고 일생 생활에서 ‘왜?’라는 물음을 갖자고 제안하고 있다. 



▲ 홍세화 /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한겨레신문사 / 2002 / 9,000원
ⓒ 한겨레신문사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안은 이미 각종 인터넷 매체나 일부 대학 교수 등에 의해 부족하나마 토대가 마련되어 가고 있다지만, 마지막 방안으로서의 “왜?”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오히려 우리네 부모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왜”라는 물음을 없애려 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가나다’도 떼지 못한 코흘리개에게 ‘ABC’를 외우게 하는 데 바쁘고, 하늘은 왜 파란지 함께 궁금해 하기보다는 “하늘은 원래부터 파래서 그럴거야!” 혹은 “그런 건 알아서 뭣해!”하는 핀잔이 먼저 나온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제기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어도 “빨리 학원이나 가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절망하진 말자. 우리 역사는 느리지만 그래도 도도히 흘러 발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해방 이후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는 못했지만 기나긴 군사정권기를 이겨냈고, 해방 반 세기만에 (김대중 정권의 공과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정권교체라는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도 맞이했다. 

이전에는 말도 꺼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인권이라는 가치가 요즈음에는 심심치 않게 장삼이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또 ‘조중동 카르텔’에 대항하는 각종 매체들이 생겨나고 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 역시 적지 않은 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금기로 통했던 “Why Not?” 혹은 “Why?"라는 질문이 서서히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홍세화, 그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단다. 그는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단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군인이라 하더라도 ‘나홀로 척탄병’ 역할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무기로 그 대열에 동참할 자원병,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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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군사기지 건설 반대 ‘섬 전체 투쟁’ 불붙나

2014.09.23주간경향 1093호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에 청년들이 대거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젊은이들에게도 심각한 삶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8월 말에 일주일 일정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한국에서 오키나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것과 현장의 분위기를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간의 ‘온도차’가 있다. 아베 일본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 변경을 각의에서 결정한 이후 17년간 쟁점이 되었던 후텐마 기지의 북부 헤노코로의 이전이 공세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키나와 현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결정 당일 오키나와 현지의 양대 언론인 <류큐신보>와 <오키나와 타임스>는 이를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맹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류큐신보>는 각의에서의 해석 변경이 평화헌법을 무력화하는 쿠데타적 발상이며, 이 사태는 결국 오키나와를 또 다른 전쟁위협으로 몰고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 “또다시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으로 만들 텐가”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시위대들이 8월 14일 오키나와 나고 앞바다에서 카누를 타고 해상시위를 벌이다 일본 해안경비대에 제지당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해상보안청 보트가 카누시위대 압박
‘악마의 섬’이라는 표현은 수사적인 것이 아니다. 태평양전쟁 시기 미국의 점령 이후 현재까지 오키나와는 사실상 미국의 군사식민지로서의 성격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전쟁에 오키나와의 군사기지가 사실상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걸프전과 테러와의 전쟁 등에서 전폭기가 발진한 곳은 오키나와 미군기지였다. 베트남전쟁 시기 오키나와는 ‘악마의 섬’으로 불렸다. 베트남인들은 오키나와에서 발진해 맹폭을 퍼붓는 폭격기를 저주하면서 동시에 오키나와도 저주했다. 중세 중국인들이 오키나와라는 발음과 유사한 음차표기를 사용해 악귀도(惡鬼島)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베트남인들이 전쟁 당시의 오키나와를 실제로 ‘악마의 섬’으로 불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의 참담한 비극을 체험했기에 그 어떤 민족보다 평화에 대한 갈망이 크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도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반전집회가 계속되었으며,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탈영한 미군들을 보호해주고 망명시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인들은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희생되었다. 섬 주민의 3분의 1가량이 희생된 전쟁의 비극은 오키나와인들에게 ‘군대는 국민을 지키지 않는다’는 교훈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따라서 오키나와의 ‘반전평화주의’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을 노골화하고 ‘중국 위협론’을 근거로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향후 200년간 활용할 것이라며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노골적으로 강행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에 오키나와 방위국은 해상기지 예정지인 오우라 만 매립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일본 본도에서 용역들을 불러와 기지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배제하고, 해상에서는 해상보안청 요원들이 주민들의 카누시위를 압박, 연일 시위 참가자를 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헤노코 신기지 반대행동은 나고 시민들의 현장투쟁에서 더 나아가 오키나와 특유의 ‘섬 전체 투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내가 오키나와를 방문했던 8월 23일에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8·23 현민 대행동이 있었다. 나는 8월 22일과 23일 양일간에 걸쳐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부 앞 정문과 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지 반대행동을 취재할 수 있었는데, 주민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점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8월 22일 주민들의 감시선인 평화호를 타고 현민들의 해상 카누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오우라 만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경비선들이 기지 건설구역을 표시하는 부표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고, 해상에는 대형 구축함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오키나와 현민들은 10여척 이상의 카누를 타고 기지 건설현장을 대응감시하고 있었는데, 해상보안청 소속 모터보트가 카누시위대에 바짝 붙어 공세적으로 압박하는 풍경을 자주 보았다.

오는 11월 지사선거에 최대 이슈로
그날 평화호에는 야마우치 쓰에코, 아라가키 세이료 오키나와 현의원, 지역 언론 취재기자, 영국의 프리랜서 기자인 마이클과 내가 동승했는데, 취재·조사를 목적으로 배에 타고 있는 우리에게 해상보안청 요원들이 강한 경고방송과 충돌위협을 거듭하면서 카메라로 우리들을 채증했다.

캠프 슈와부 정문에는 약 80명의 주민들이 천막을 치고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예전과 다른 모습이라면 류큐대학과 오키나와대학을 포함한 오키나와의 대학생들이 다수 집회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어린 중·고생들도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방학을 맞아 그들은 기지 앞에서 상주하면서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에 청년들이 대거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젊은이들에게도 심각한 삶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 정부의 기지 건설 강행이 역으로 오키나와 특유의 ‘섬 전체 투쟁’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실제로 8월 23일 오후 1시 캠프 슈와부 정문 앞에서 진행된 ‘8·23 현민 대행동’에는 3600여명의 오키나와 현민들이 집회에 참여해 기지 건설에 항의했다. 캠프 슈와부가 위치해 있는 북부 나고시 헤노코로 이동하기에는 교통과 주차시절 모두가 빈약하기 때문에 오키나와 본도 각 지역에서 30대의 임대버스를 타고 현민들이 운집한 셈인데, 헤노코 투쟁이 시작된 이후 이렇게 많은 주민들이 집회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라고 집회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오키나와 현민들의 ‘섬 전체 투쟁’이 다시 촉발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은 이미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1월에 있을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는 반기지운동 측에서건 아니면 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일본과 미국 정부 차원에서든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부의 기지 건설 강행과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가 맞물리면서 ‘기지건설 반대’ 문제는 가장 중요한 선거 쟁점이 되었다. 현재의 지사인 나카이마 히로카즈 지사에 대항하여 같은 자민당 소속인 오나가 다케시 나하 시장이 지사 선거에 기지 반대파 단일후보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오키나와현 주민의 81%가 기지 반대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기에 나카이마 지사의 3선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오키나와인들은 지지정당과 좌우이념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의한 소녀 성폭행 사태, 교과서에서의 집단자결 삭제 문제, 신기지 건설 문제 등 오키나와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이슈에 대해서는 ‘섬 전체 투쟁’을 전개하는 항쟁의 전통을 이어왔다. 이는 일본과 미국에 의한 이중식민지 체제가 초래한 폭력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오키나와식 평화주의와 함께 자립과 자치에 대한 열망에 다름 아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7&artid=20140916134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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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파병 50년, 강요된 경계 넘기


등록 : 2014.09.21 18:41 | 이유진 기자 

역사문제연구소, 강연 등 행사

역사문제연구소는 올해 베트남전쟁 파병 50주년을 맞아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시민단체 ‘전쟁 없는 세상’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다양한 경계넘기’ 행사를 마련했다.


2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 <돌아온 술주정뱅이>(오시마 나기사 감독, 1968)를 상영한 데 이어, 25일 저녁 7시 서울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 강당에서는 ‘전쟁 거부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을 주제로 세키야 시게루 전 자테크(JATEC) 활동가의 강연을 연다. 자테크는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기술위원회’의 약자로, 일본 내 미군 탈영병의 망명을 돕기 위해 은신·도피·망명 기술을 개발하는 반전 시민운동 조직이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 베트남반전운동 단체였던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에 참여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이 따로 만든 자테크는 열린 시민운동을 지향했으며 ‘탈영’을 사회적 연대의 계기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번에 초청된 강연자 세키야 시게루씨는 초창기부터 자테크에 참여한 인물로, 당시 활동 기록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27일 오후 2시에는 같은 장소에서 ‘베트남전과 아시아의 상상력’ 학술회의를 연다. 김예림 연세대 교수가 ‘냉전기 아시아 상상의 정치학과 베트남전’을, 정영신 제주대 교수가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의 관련성’, 백승욱 중앙대 교수가 ‘리영희의 국제주의적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각각 발표한다.

역사문제연구소는 “반전운동을 통해, 또는 어느 쪽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상을 통해, 강요된 경계를 지워가며 서로 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우리 앞에 놓인 경계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전쟁의 ‘현재’를 직시하고 해방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상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56091.html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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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류큐 왕국'의 옛 성
'슈리 성'등의 유적과 선명한 색의 해변, 산호초등, 자연이 함께 하는 섬



규슈와 대만의 거의 중간에 있는 오키나와 현은, 크고 작은 100 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되며, 일본열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겨울에도 도쿄나 오사카의 봄 기온으로, 일년 내내 온난한 기후를 자랑한다.

각 섬에는 벤골보리수와 아코 등 열대·아열대성의 식물이 서식하며, 일년내내 꽃으로 활짝피는 환상적인 현이라 할 수 있다. "이리오모테 섬"은 천연기념물인 "이리오모테 산고양이" 등 희귀한 생물이 많이 사는 섬이다. 하얀 남국의 해변과 무수한 산호초, 색깔 선명한 물고기가 춤추는 맑고 투명한 파란 바다는 리조트장소와 다이빙 장소로서도 유명하다.


오키나와는 15 세기에서 19 세기 중반까지의 약 400 년 동안 "류큐 왕국"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해 번창해 왔었다. 여러 외국과의 교류에 의해 형성된 문화와 전통은 공예품과 축제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독특한 매력의 오키나와를 형성시킨 이유 중 하나이다. 특히 1992 년 "나하 시내"에 복원된 "류큐 왕국"의 옛 성·"슈류 성"은 세계유산으로도 등록되어, 좋은 관광코스로 알려져 있다.

선홍색의 의상을 입은 여성이 연인이나 남편을 사모하는 감정을 표현하며 우아하게 춤을 추는 "류큐 무용"과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다양한 색채의 털을 가진 사자가 춤을 추는 "시시 춤", 웅장한 북의 소리와 "샤미센"이라 불리는 일본전통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집단으로 춤을 추는 "에이사" 등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독자적인 전통예술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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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평화주의 신념과 동성애 지향'을 이유로 병역거부 를 한 김경환(30)씨의 캐나다 망명이 한국에서 병역거부를 둘러 싼 논란에 관심이 쏠릴 전망이다.

밴쿠버 중앙일보는 지난 2009년 7월 6일 캐나다 이민ᆞ난민심 사위원회(IRB)가 김 씨의 난민지위를 부여한 결정문을 긴급입수 해 전문을 싣는다.[밴쿠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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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망명] 이민 및 난민 위원회 난민 보호 분과 RPD File / No. dossier SPR : MA6-0428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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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보기 : http://www.joongang.ca/m/bbs/board.php?bo_table=g100t100&wr_id=842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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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렇게 6페이지 뜸 (어제 방문자 151건 중 120명이 해당 검색어로 들어옴.)


다들 군대 안 가고 싶긴 한가보다. 아님 갔다 왔으니(갈 거니까, 남자였으면 갔을 거니까욕하고 싶거나.

연재기사 나올 때마다 유입 폭발함.



원래는 성적인 키워드(ㅈㅇ, 남친이랑, 썰베 따위)랑 독신으로 살겠다, 오토바이, 태국 관련 유입 순으로 조금씩 나와서

네이버 검색으로 100 내외, 다음, 구글, 티스토리 등 합쳐서 50이내 이정도 나왔던건데.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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