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44491

Posted by 정규화
:

일베도, 오유도 혐오하는 새누리당 의원

게시됨: 업데이트됨: 

“예쁜 필리핀 여자는 다 한국 남자들 차지지.”

http://www.huffingtonpost.kr/2015/03/17/story_n_6883538.html?1426578760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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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콜걸의 비밀일기' 작가 "나는 콜걸이었다"
  • (서울=연합뉴스)
입력시간 : 2015/03/17 09:27:23
 
수정시간 : 2015/03/17 09:27:23


http://economy.hankooki.com/lpage/worldecono/201503/e20150317092723117900.htm




Posted by 정규화
:

각국 AIIB 줄줄이 동참…美·中 권력이동 신호탄

  •  53,424
  •  6

입력 : 2015.03.17 19:09|수정 : 2015.03.17 21:26


<앵커>

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와 더불어서 중국과 미국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게 바로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 AIIB입니다. 중국이 주도하고, 미국은 반대하고 있는 이 AIIB에 서방 국가들이 속속 참여를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최효안 기자가 분석했습니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884531&plink=TOP&cooper=SBSNEWSEND

Posted by 정규화
:

DR콩고 분쟁

아프리카 내 DR콩고 분쟁 위치

DR콩고 분쟁 지도

개요

이 분쟁은 32년간 독재 정권을 유지해 온 조셉 모부투(Joseph MobutuMobutu Sese Seko) 정권과 이에 대항해 온 카빌라(로랑 데지레 카빌라-Laurent Desire Kabila) 반군 세력 간에 정권쟁탈을 둘러싼 분쟁이다. 기존의 콩고공화국과 자이르는 콩고왕국에 속했으나 19세기말,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콩고강을 중심으로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콩고강 서쪽지역(현 콩고)에는 프랑스가, 동쪽 지역(구자이르, 현 콩고민주공화국)은 영국이 각각 점령하였다.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인 킨샤샤는 당시 영국 탐험가 스탠리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1885년 콩고조약에 의거해 동쪽(구자이르 지역)은 벨기에령으로 서쪽(콩고)은 프랑스가 1960년 독립 당시까지 각각 지배하였다. 양국은 브라자빌 콩고(현 콩고)와 레오폴드빌(Leopoldville) 콩고(구자이르-Zaire)로 각각 불리다가, 1971년 집권한 동콩고의 모부투 대통령이 국명을 자이르로 부르기 시작했다. 1997년 5월 내전을 통해 새로 권력을 잡은 카빌라가 국명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DRC)으로 변경하였다.

자이르는 250여 종족으로 이루어진 아프리카 세 번째의 대국으로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역 세력 간의 정권 쟁탈 경쟁과 분리독립 운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게릴라 활동과 쿠데타가 빈번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어 왔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1965년 모부투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동서냉전의 구조 속에서 32년간 독재정권을 지속하여 왔다.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국의 지원이 사라지자 모부투 정권도 약화되어 1990년 4월에는 일당독재에서 복수정당제로 이행하는 등 민주화를 진전시켰다. 그러나 1994년 이후부터 이웃 르완다 내전으로 난민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동부지역의 긴장이 고조되는 등 자이르 내분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웃 부룬디와 르완다에서 투치족이 후투족을 박해하자 후투족들은 죽음을 피해 자이르로 피난하여 난민촌을 형성했고, 이들 난민들은 자이르를 거점으로 한 게릴라를 형성해 부룬디와 르완다를 공격하였다. 한편 부룬디와 르완다의 정부군들은 후투족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자이르 국경을 넘어 오자 자이르 정부군이 이들의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자이르 정부는 1995년 인근 르완다와 부룬디의 부족분쟁에 의해 유입된 난민 약 120만 명의 강제송환을 시작하였으나, 8월 UN의 요청에 따라 중지하였다. 자이르 정부는 1996년 2월 국내의 르완다 난민(약 112만 명)의 캠프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정부군이 르완다 난민 캠프를 포위하여 압력을 가했으며, 동년 10월 자이르의 투치족은 동부의 후투족 피난민 캠프를 습격하여 112명을 살해, 난민 2만 명의 탈출이 시작되는 등 부족 간의 항쟁이 다시 격화되기 시작했다.

난민의 탈출은 당초 1996년 10월 13일 동부 우비라(Ubira)의 르완다 난민(후투족) 캠프에서 약 2만 명이었으나, 투치족의 습격을 무서워한 후투족 난민의 대다수가 탈출을 시작하여, 10월 20일에는 6만 명, 26일에는 60만 명, 11월 1일에는 70만 명, 6일에는 피난민이 120만 명에 달하면서 동시에 사망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난민의 대집단은 11월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향해 이동을 시작하여, 12월초에는 일부가 탄자니아에도 향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중 50만 명은 산중으로 피난하였다. UN 안보리는 1996년 11월 15일 다국적군 1만 명을 파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29일에는 이를 정정하여 330명을 파견하기로 하는 등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12월 1일부터는 식량과 의료품의 긴급원조를 전개하여 12월말에 임무를 종결하였다.

모부투 정권은 특히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도주 과정에서 3개월 만에 50만 명의 투치족을 학살하고 자이르로 유입된 후투족 중심의 구르완다 정부군과 후투족 민병을 이용하여 자이르 동부지역의 투치족계의 바냐물량게(Banyamulenge)족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한 바냐물량게족이 중심이 된 범반정부조직인 콩고·자이르해방민주세력연합(ADFL)이 1996년 10월 결성되어 모부투의 정부군과 연합한 구르완다 후투족 정부군과 전투가 개시되었다. ADFL은 르완다, 우간다, 앙고라 등으로부터 무기 공여와 군사훈련 등의 지원을 받아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였고, 반면 탈냉전으로 미국의 지원을 상실한 정부군은 쉽게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 5월 17일 카빌라가 이끄는 ADFL 반군이 수도 킨샤샤(Kinshasa)를 무혈점령함으로써 모부투의 독재로 비롯된 내전은 사실상 일단락되었으며 모부투는 모로코로 망명하여 사망하였다. 한편 모부투 정권의 종말은 아프리카 국가 독재국가들의 몰락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모부투는 자이르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재 정치를 실시하며 자신은 최고의 사치를 누리며 국가는 아프리카 최고의 빈국으로 전락시켰다.

ADFL의 카빌라 의장은 집권과 동시에 국명을 콩고민주공화국(DRC)으로 개명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모부투와 마찬가지로 카빌라 또한 강한 독재정치를 실시하고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등 서방측의 비난을 받고 있는 한편 1997년 자이르 난민캠프에서 르완다로 귀환 중 르완다 난민 20만 명이 실종된 것과 관련 UN측의 조사를 받고 있다. 1996년 10월의 내전 개시 이후 후투족 난민 1백만 명이 실종됐으며, 11월 난민 역사상 최단 기간에 가장 많은 인구인 50만 명이 이동한 엑소더스로 이어졌다. 서방국가들은 인권문제와 민주화의 행방을 주시하며 원조에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카빌라 대통령은 1997년 7월 20일 수도 킨샤샤에서 주변 8개국 임시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난민학살 등은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부투의 축출과 반군 세력인 카빌라의 집권으로 내란이 종식된 것 같이 보여지던 상황이 1998년 7월 돌연 카빌라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을 도운 르완다 투치족을 비롯해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재발되었다. 카빌라의 철수 요구에 배신감을 느끼며 반발한 르완다 투치족은 반군 세력에 합세해 카빌라 정부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여 내전은 다시 격화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1998년 9월 15일 수단이 2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카빌라 대통령의 정부군 편에 추가로 합세하면서 아프리카 10여개국이 진영을 나눠 대립하는 국제전으로 번졌다. 카빌라 정권에는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잠비아 등이 병력과 전폭기, 탱크 등을 지원하였고, 반군측은 르완다와 우간다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미국과 남아공이 개입을 하기 시작하였다.

투치족이 지배하고 있는 르완다가 참전한 이유로는 카빌라 정권이 국경지역의 후투족 의용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고 보고 이에 안전한 국경수비를 위해 투치족이 중심이 된 반군세력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간다는 콩고지역에 거점을 둔 자국 게릴라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콩고민주공화국의 정치안정이 필요하다며 반군 편에 섰다. 정부군편인 앙골라는 반정부 게릴라 조직인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을 지원하는 콩고민주공화국 내 반군세력을 차단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의 의장국인 남아공화국도 중부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 미국은 1998년 9월 25일 콩고민주공화국 내 모든 외국병력의 철수를 촉구하며 개입의사를 밝혔다. 한편 수단 병력으로 보강한 정부군과 아프리카 연합군은 9월 15일 반군들의 거점인 동부 국경도시 고마(Goma) 인근 50㎞ 지점까지 진격, 마지막 대공세를 준비한 바 있다.

1999년 1월 18일에는 콩고, 차드, 우간다, 에리트리아 등 아프리카 4개국 대통령이 카다피 리비아대통령의 중재로 콩고 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리비아 해안도시 서트에서 가다피(Gaddafi)의 주선으로 4개국 대통령이 이틀간 회담한 끝에 체결됐다. 회담에는 로랑 카빌라 콩고 대통령, 콩고의 동맹국인 차드 대통령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콩고반군 지원국인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 분쟁과 무관한 에리트리아의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Isaisas Afeworki)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러나 콩고 반군은 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내전이 국제전으로 비화되면서 인근 국가들에 전장을 제공한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 내전 종식을 위해, 18일 리비아 해안도시 시르테에 모인 아프리카 4개국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서명한 주요 사항은 ▲ 즉각 휴전 ▲ 분쟁지역에 아프리카 평화유지군 주둔 ▲ 외국군 철수와 내정간섭 중단 ▲ 콩고 측에 거국적 회담 촉구 등이다. ’88년 팬암기 폭파사건 테러용의자를 스코틀랜드에 인도함으로써 국제 제재의 빗장이 다소 풀린 리비아의 카다피가 평화 거간꾼으로 나섰고, 당사국인 콩고 정상, 친‐반 콩고 지도자와 옵서버가 두루 참가해 구색을 갖춘 모임이었다. “아프리카 단결의 길을 열게 됐다”는 카다피의 평가지만, 평화정착을 낙관하긴 이르다고 외신이 전했다. 반군 지도자 어니스트 왐바 디아 왐바(Ernest Wamba dia Wamba)가 ‘어떤 협상도 거부한다’며 불참했기 때문이다.

2000년 시점에서 반군은 콩고 동부 3분의 1을 장악한 상태다. 관련국들은 ‘콩고가 다양한 종족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해법을 찾기 힘들다’며 유엔이 나서 초당파적 묘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외국군 철수로 인한 힘의 공백과 그것이 자국에 미칠 영향을 암산하고 있는 주변국들은 섣불리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2년 4월 'M23'이 다시 반군 활동을 개시하기 이전까지 카빌라 대통령이 이끄는 DR콩고는 불안하지만 평화로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국가재건 의지를 강하게 표방하였던 카빌라 정부에 대해 국제사회도 점차 신뢰를 보내면서 본격적인 지원도 시작하였다. 2012년 들어 DR콩고에서는 또 다시 유혈 사태가 시작되었다. 르완다의 소수 부족인 투치족 출신 장군 보스코 은타간다가 이끄는 반군 세력 M23이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보스코 은타간다 장군이 이끄는 군인들이 정규군에서 이탈해 반군이 되면서 DR콩고에서 2년 동안 계속된 평화 분위기는 무너지고 있다.

이 반군은 지난 2009년 3월 구 반군이 정부와 휴전을 맺은 한 날에서 M23이라 이름짓고 르와다와 국경인 산악지방을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M23 세력은 DR콩고 정부군과 대립하는 것은 물론, UN 평화유지군에도 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분석

[의미 및 영향]

동 분쟁은 독립 이후 지속되어 온 내전이 일단락된 뒤 이웃 르완다와 부룬디의 투치족과 후투족의 종족 간 대립에 직접적으로 연루되면서 확대된 분쟁이다. 부룬디와 르완다에서 투치족이 후투족을 박해하자 후투족들은 죽음을 피해 자이르로 피난하여 난민촌을 형성했고, 이들 난민들은 자이르를 거점으로 한 게릴라를 형성해 부룬디와 르완다를 공격하였다.

사태의 추이에 따라 양 부족들이 대거 자이르 영내로 유입되어 자이르 내에 잠재되어 있는 양 부족간의 대립을 자극하였고, 이에 따라 모부투 정권은 자국내 투치족 바냐물량게 반군의 제거를 위해 후투족 출신의 구르완다군을 이용하였다. 냉전 종식으로 미국의 지원을 상실한 모부투 독재정권은 투치족 바냐물랑게를 중심으로 한 범 반정부 세력 연합의 공격에 의해 와해되고, 반군의 카빌라가 집권하여 동 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기 시작했다. 동 분쟁은 대량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으며 1996년 10월의 내전 개시 이후 후투족 난민 1백 만명이 실종됐으며, 11월 '난민역사상 최단 기간에 가장 많은 인구인 50만 명이 이동한'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1997년 집권 이후 카빌라 대통령은 돌연 자신을 도운 르완다 투치족의 축출을 시도하였고, 이에 반발한 르완다 및 국내 투치족이 1998년 8월 전투를 개시하여 내전이 재연되었다. 여타 아프리카 빈국의 내전과는 달리 부존자원이 풍부하고 경제성이 높은 콩고민주공화국의 분쟁에는 항상 많은 외국 세력이 개입을 해왔다. 동 분쟁은 10개국이 관여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분쟁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진행 중인 동 분쟁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는 개입세력 및 지지세력의 변화가 다소 보인다는 점이다. 카빌라의 UDFL이 모부투와 내전을 벌일 당시에는 르완다, 탄자니아, 우간다, 앙골라, 짐바브웨, 에티오피아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1998년 8월부터 재개된 내전에서는 앙골라와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수단 등이 카빌라의 정부군을 지원한 반면, 르완다와 우간다는 반군세력을 지원하고 있다.

국제전의 양상으로 인해 DR콩고 분쟁이 '아프리카의 1차 대전'이라고까지 불리었던 것처럼 2012년 봄에 M23 반군 세력에 의해 재개된 유혈사태는 또 다른 국제 분쟁을 예고하고 있다. 2012년 9월 8일, 우간다에서 동부 아프리카 지역 정상들이 모여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의 반군-정부 간 내전 상황 해결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나 돌파구를 찾지 못하였다.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 주재로 캄팔라에서 열린 '대호수지역 국제회의(ICGLR)'는 중립국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을 민주콩고 동부 지역에 보내는 방안에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카빌라 정부가 M23 반군 세력의 배경에는 르완다와 우간다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UN 안보리도 M23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성명이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추후 전망]

정부군과 강력한 반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국과 미국 등이 10개국이 개입하여 동 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해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특히 후투족과 투치족의 종족 간 분쟁은 이웃 르완다와 부룬디의 사태에서도 보여주듯이 해결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수십만이 살해당하고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하여 주변국을 배회하고 있어 동 분쟁이 더욱 장기화되고 대량의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또한 국제적인 테러국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수단이 개입함으로써 수단을 적대시하는 미국 등 기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동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더욱 복잡한 상황으로 사태가 악화될 여지가 다분하다.

1999년 1월 18일 인근 4개국이 모여 평화협정안에 서명을 하긴 했으나 아직 콩고의 1/3을 장악하고 있는 반군의 세력이 완전히 꺾이지 않은 상태여서 평화가 도래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수차례의 정전협상도 결국 무위로 끝난 상황에서 2000년 2월에는 유엔이 평화유지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유엔군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가 앞으로의 향방에 주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콩고분쟁은 단순히 내전 보다는 인접국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 해결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파병이 결정되었으나, 실질적인 파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1999년의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RCD와 MLC의 활동은 지속되고 있으며, 반군을 지원하는 르완다와 우간다가 개입하여, 상호 전투를 벌이는 등, 국제전으로 비화될 위험성도 안고 있다. 한편 콩고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 등은 콩고내전이 장기화되자, 카빌라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지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12월초 정전협정 이행을 위해, 상호간의 완충지대 설정에 합의하고 있으나, 유엔감시단이 파견되더라도 상호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2010년 현재 동 지역은 주변국과 반군들과의 평화회담, UN을 비롯한 EU국가들의 평화 유지군 파병 등이 이어지고 있으나 DRC 내부는 여전히 크고 작은 부족 간, 정쟁 간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금년도에 키미라 II(Kimia II) 작전이 아마니 레오(Amani Leo) 작전으로 작전명이 변경이 되어 새로운 작전이 수행되고 있기 때문에 DRC의 노력이 어디까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마(Goma) 지역을 비롯해 북 키부(Nord Kivu), 남 키부(Sud Kivu) 지역에서 주민, UN 평화유지군, 정부군에 대한 공격 뿐 아니라, 반군간의 충돌, 반군과 정부군과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UN군 뿐 아니라 반군 또한 휴전 협상을 비롯한 평화 협상을 지속해 나가고 있으므로 2000년대 전반기 보다는 조금 더 안정된 DRC를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DRC 내분은 DRC 내의 민족 분쟁 뿐 아니라 주변국의 후투, 투치족의 갈등 등 민족 분쟁 또한 얽혀 있기 때문에 DRC와 UN군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주변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도움이 필요하며 UN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2012년 들어 DR콩고에서는 또 다시 유혈 사태가 시작되었다. 르완다의 소수 부족인 투치족 출신 장군 보스코 은타간다가 이끄는 반군 세력 M23이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보스코 은타간다 장군이 이끄는 군인들이 정규군에서 이탈해 반군이 되면서 DR콩고에서 2년 동안 계속된 평화 분위기는 무너지고 있다.

이 반군은 지난 2009년 3월 구 반군이 정부와 휴전을 맺은 한 날에서 M23이라 이름짓고 르와다와 국경인 산악지방을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M23 세력은 DR콩고 정부군과 대립하는 것은 물론, UN 평화유지군에도 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전의 내전이 국제전 양상을 띠었던 것처럼 M23의 반군 활동으로 재개된 2012년 DR콩고의 또 다른 내전은 이미 수십 만 난민들을 이주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뿐만 아니라, DR콩고 내부에서 그치지 않고 우간다와 르완다까지도 연루되고 있어 당분간 서아프리카권역에서의 긴장을 고조시킬 전망이다.

일지

일자주요내용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 다수의 지역세력의 정권다툼 및 분리독립 분쟁 표출

1965년

모부투 집권

1971년

국호를 콩고에서 자이르(Zaire)로 변경

1984년

게릴라전 재개됨

1991년

다당제 허용 및 과도내각 구성 등 민주화 추진

1994년

과도내각 해산 후, 폭동 및 학살지속

1996년 2월

난민캠프 폐쇄 개시

1996년 8월

고마(Goma) 체류 르완다 난민 100만 명 귀국 합의

1996년 10월

자이르 내 난민기지에 대한 투치족 무장세력의 공격으로 75만 명 방랑. 범반정부연합 AFDL 결성

1996년 10월 25일

자이르‐르완다 양국 국경에서 양국군, 본격적인 전투 개시

1996년 10월 30일

UN, 자이르, 르완다 분쟁 수습 위해 특사 파견

1996년 10월 31일

자이르, 르완다 부룬디 우간다 3국과 단교

1996년 11월 1일

자이르 고마에서 전투 격화, 난민 약 75만 명 발생. UN 안보리, 자이르 르완다 간 즉각 휴전 요구 의장성명 채택

1996년 11월 2일

르완다군, 자이르 동부 고마 장악

1996년 11월 4일

자이르 투치족 무장세력, 고마 제압 선언, 3주간 정전 성명

1996년 11월 5일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동부 및 중부지역 7개국 정상회의 개최(케냐, 나이로비) 자이르 사태 관련 UN 안보리에 120만 후투족 난민 구호를 위한 중립군의 신속 배치를 촉구

1996년 11월 6일

자이르 대통령, 다국적군 파견에 찬성 표명

1996년 11월 9일

내전 격화에 따라, UN 안보리 자이르에 난민구조 위한 다국적군 파견 준비 결의

1996년 11월 10일

자이르 무장세력, UN과 난민 귀환 회랑() 설치 합의

1996년 11월 13일

미국, 자이르 파견 다국적군 참가 발표

1996년 11월 15일

자이르 거주 르완다 후투족 난민 20여만 명 귀환 개시

1996년 11월 16일

UN 안보리, 자이르 난민구호활동 지원을 위한 다국적군 파견 결의안 채택(미, 영, 불 등 15개국 군 1997년 3월까지 4개월간)

1996년 11월 17일

자이르 파견 프랑스군 1진 35명 르완다 도착

1996년 11월 18일

자이르 거주 르완다 난민 50만 명 귀국

1996년 11월 23일

자이르 인도원조국회의 제네바에서 개최, 16개국 참가

1996년 11월 27일

UN 안보리, 골란고원 파견 UNDOF 주둔 기간 6개월 연장 결의 채택

1996년 11월 29일

미, 일 , 캐나다 등 14개국 대표, 캐나다 오타와 회의에서 자이르 동부의 후투족 난민구호 임무수행을 위한 다국적군 파견 결정(사령부: 우간다의 엔테베 병력 1∼2천명)

1996년 12월 1일

자이르 파견 다국적군 구원활동 개시. 우간다군 자이레 베니 제압, 자이르군과 충돌. 부룬디 난민 탄자니아로 이동

1996년 12월 4일

르완다로 향하는 귀국 난민, 다시 자이르의 내륙으로 이동

1996년 12월 6일

자이르 동부 와리카레헬에 르완다 난민 10만 명 도착

1996년 12월 7일

자이르 고마 주변에서 사체 2,700명 이상 확인

1996년 12월 17일

모부투 자이르 대통령, 4개월 만에 프랑스로부터 귀국

1996년 12월 23일

자이르군, 고마 북부 도시 브니야 지역 공격 개시

1996년 12월 24일

자이르 위기관리 내각 발족

1997년 3월 15일

자이르 제3의 도시 키상카니(Kisangani)가 반군 및 투치족의 대공세에 의해 함락

1997년 3월 17일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 가족 및 수행원 콩고로 탈출

1997년 3월 26일~27일

자이르 내전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아프리카단결기구(OAU) 정상회담 개최(토고 수도 로메-Lome)

1997년 3월 27일

자이르 정부‐반군 측 대표, 전투중단 선언 및 내전종식 모색 위한 평화회담 개시 합의

1997년 4월

모부투 자이르 대통령, 반군이 전 국토의 1/3을 장악하고 휴전협상도 결렬된 가운데 비상사태 선포

1997년 5월 7일

반군, 승리 선언. 내전 종료 선언

1997년 5월 27일

반군 리더 카빌라(Kabila), 국명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개명함과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 반군 9명 및 야당인사 4명을 신정부 각료로 기용. 국방장관은 대통령이 겸직

1997년 9월

모부투 세코(Mobutu Sese Seko) 전 자이르 대통령, 망명지 모로코의 수도라바트(Rabat)에서 사망

1998년 4월 9일

군인 2명을 국방상과 내무상으로 임용하는 등 구국 내각 구성. 반정부 세력은 9일 제2도시인 루분바(Lubunba)시를 점령

1998년 4월 13일

3월 게릴라에 패배한 후 사임된 켕고 전 수상이 국외 도주 발표, 반역죄(전비 착복 등)로 기소 의사 밝힘

1998년 7월 1일

반대파 지도자인 에티엔느 치세케디(Etienne Tshisekedi)는 국내 추방에서 해제, 카빌라 대통령에 협조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경찰은 그를 감시하면서 그의 지원자들을 체포

1998년 7월 3일

정부군과 콩고제국을 건설하려는 콩고 부족 간에 종족 충돌 발생, 2명의 군인과 6명의 민간인이 사망

1998년 7월 6일

우간다 반군인 동맹민주군은 키쿠라(Kikura) 훈련소가 있는 육군 기지를 공격. 라이벌 종족 반군인 투치족에 대해 습격

1998년 7월 14일

전 모부투 정권하에서 참모장을 지낸 셀레스틴 키푸아(Celestin Kifua) 장군이 총 참모총장에 임명됨. 경찰은 에티엔느 치세케디 지원자 30명을 체포. 7월 2일 콩고제국 건설을 주장하였던 콩고 내 9개의 부족 대표들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인권단체들은 UN이 콩고 내 인권 탄압과 인종학살에 대해 나약하다고 비난

1998년 7월

카빌라 대통령, 르완다군 등 외국군 철수 명령. 르완다 투치족 반발, 분쟁 재발

1998년 7월 28일

카빌라 대통령은 르완다인과 여타 외국인들은 육군에서 떠났으며, 무장하에 있는 14만 명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위군을 창설하겠다고 발표

1998년 8월 3일

동부 지역 주둔 투치족이 주축이 된 '콩고 자이르 해방 민주세력연합(ADFL)'의 무부치 사령관은 정부지지를 포기 반정부 활동 선언. 이에 대해 동 국 대통령은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 반란진압 방침 결정

1998년 8월

르완다, 콩고 일부 지역 칩입

1998년 8월 4일

콩고난민들이 르완다에 유입. 콩고정부는 르완다의 키부(Kivu) 침략을 비난하고 UN이 르완다군의 콩고 철수를 명령해 줄 것을 요청. 잠비아는 콩고군의 월경 증가 이후 국경 폐쇄

1998년 8월 5일

아더 자히디 응고마(Arther Zahidi Ngoma)를 새로운 반군 지도자로 선임, 그는 투치족의 반란이 아니라 콩고 인민의 반란이라 주장

1998년 8월 6일

르완다는 카빌라가 후투 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고 있다고 비난. 짐바브웨는 카빌라군을 지원하기 위해 10명의 군사고문단 파견

1998년 8월 7일

카빌라는 콩고 내전의 인접국 파급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짐바브웨에서 개최예정인 정상회담에 관심 표명

1998년 8월 8일

짐바브웨, 르완다 등 아프리카 7개국 수뇌는 긴급 회동, 정전 실현을 위한 위원회 설치 합의. 탄자니아, 잠비아, 나미비아, 짐바브웨는 콩고 내전 종전을 협의하는 위원회 설치

1998년 8월 9일

콩고는 르완다군이 생포한 콩고 관리를 조정하고 콩고인들을 르완다 내 집단 캠프로 추방하고 있다고 비난

1998년 8월 11일

카빌라 정부는 부카부(Bukavu) 공항과 우비라(Uvira) 공항을 재탈환. 카빌라는 르완다와 우간다의 침략을 비난해 줄 것을 요구(양국은 국경지대로부터 게릴라를 축출하기 위해 안전지역을 설정). 인권감시단은 콩고 정부가 12세의 어린이까지도 징병하고 있다고 비난

1998년 8월 12일

케냐는 카빌라를 지원. 앙골라 정부는 콩고 분쟁의 자국에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경계 강화. 미국은 콩고군이 주 콩고 미국대사관을 강제적으로 포위한 것에 항의. 콩고 정부는 반군을 지원하는 국가의 모든 국민들에 대한 비자를 취소하고 국제적 경고 단행

1998년 8월 13일

프랑스는 어떠한 형태의 개입도 없었다고 주장. 앙골라 UNITA는 콩고 국토의 1/3을 점령하고 있는 콩고 UNITA를 위해 투쟁(반군 측 실벤 부키 장군은 콩고 국토의 1/3을 점령했다고 발표). 르완다는 투치 부족에 반대하는 카빌라 체제에 의해 자행된 인종 학살을 비판할 것을 요구

1998년 8월 14일

소식통들은 미국과 프랑스가 암암리에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지적

1998년 8월 16일

반란군측은 정치연합조직인 콩고 민주연합(Congolese Rally for Democracy) 결성

1998년 8월 17일

러시아가 콩고 주재 대사관 직원을 철수. 카빌라는 반군을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을 비난

1998년 8월 19일

나미비아, 앙골라, 잠비아, 케냐, 짐바브웨는 콩고방위를 지원하겠다고 선언, 남아공과 탄자니아는 이를 거부

1998년 8월 20일

UN은 보급품과 차량이 반군과 시민들에 의해 약탈된 것에 불만 토로

1998년 8월 21일

콩고는 남아공이 반군을 지원한 것을 비난. 짐바브웨(20일)와 앙골라(21일)는 만델라의 개입 중지를 무시하고 카빌라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 탄자니아 콩고에 파병 결정(22일). 콩고 정부, 앙골라, 짐바브웨군의 반격에 직면한 반군은 남아공이 제시한 정전안을 수락

1998년 8월 23일

남부아프리카개발 공동체(SADC: 14개국)는 남아공 수도에서 긴급 수뇌 회의를 개최, 즉각적인 정전과 평화교섭 개시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서 채택하고 중재자로 만델라 대통령 지명. 앙골라와 짐바브웨는 정부군 지원을 위해 파병, 반정부군을 지원하는 르완다와 우간다도 지원군 파병 불사 태세로 지역분쟁으로의 확전 조짐

1998년 8월 24일

미국은 외국군 철수 중재 요구. 앙골라군은 수개 지역 점령(잉가-Inga 댐, 보마-Boma/바나나-Banana/모안다-Moanda 항). 콩고 정부는 우간다와 르완다가 철수한 이후 평화협상에 응하겠다고 발표

1998년 8월 25일

르완다는 자국의 안보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개입할 수 있으나, 이러한 노선이 이미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 우간다는 콩고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반군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자국군이 완충지대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 탄자니아는 콩고로부터 자국군 600명을 철수했다고 발표. 짐바브웨는 카빌라를 지원하는 외국군들은 1997년 6월에 체결된 무력에 의한 아프리카 정부 전복을 반대한다는 OSU협정을 준수하고 있다고 발언. 카빌라는 콩고 남부지역의 반군은 거의 소탕되었으나, 마타디(Matadi)는 여전히 반군의 점령 하에 있다고 발표

1998년 8월 27일

르완다는 콩고 내 투치족에 저항하여 인종학살을 명령한 카빌라를 비난. 나미비아는 자국군에 대해 카빌라 지원을 위해 싸우도록 명령. 짐바브웨는 8월 20일 이후 8,000명의 반군 침략군중 4,000명이 사망 혹은 생포되었다고 발표. 앙골라는 우간다와 르완다 침략군을 격퇴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콩고 문제에 최초로 개입

1998년 8월 28일

우간다 정부는 콩고 주재 자국군이 앙골라와 짐바브웨군으로부터 공격받았다고 주장

1998년 8월 31일

UN안보리 콩고분쟁의 정전과 외국군 철수, 분쟁종식을 위한 정치적 대화 개시를 요구하는 의장 성명 채택

1998년 9월 1일

카빌라는 국민들에게 투치족에 의해 조종받고 있다고 보여지는 모든 사람까지도 무조건 살해하도록 요구. 반군들은 카빌라의 고향인 마노노(Manono)를 점령

1998년 9월 2일

르완다와 우간다는 콩고 파병 자국군의 안전한 철수를 미국이 보장해 줄 것을 요청

1998년 9월 3일

반군들은 평화대화 개최지로서 짐바브웨를 거부. 우간다는 콩고 파병 자국군의 국경 교차지역에 대한 공격을 1년간 중단하며, 일부를 철수시키겠다고 발표

1998년 9월 6일

짐바브웨에서 콩고, 짐바브웨, 나미비아, 앙골라, 우간다, 르완다 등이 참가한 평화대화가 개시되었지만, 반군은 불참. 콩고정부는 필요한 것은 우간다와 르완다군의 철수와 반군의 항복이라고 주장

1998년 9월 7일

반군은 킨두(Kindu)를 공격, 앙골라는 칼레미(Kalemie)를 폭격

1998년 9월 8일

콩고 내분 종식을 위한 관련 6개국 회의(관련국 대통령 참가)에서 내분 종식 합의문에 서명. 참가국은 당사국인 콩고, 앙고라, 짐바브웨, 나미비아(이상 정부군 지원), 르완다, 우간다(이상 반정부군 지원). 한편 반정부군 대표도 참석하였지만, 정전합의에 불만 퇴장, 지속적 투쟁 시사

1998년 9월 9일

우간다는 수단의 콩고 반군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콩고가 공항을 폐쇄하였다고 발표

1998년 9월 10일

반군은 샤운다(Shaunda)를 체포

1998년 9월 12일

정부군은 루부투(Lubutu)를 체포

1998년 9월 14일

고마에서 격전 지속. 남아프리카 개발위원회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평화회의 개최를 요구, 나미비아, 앙골라, 짐바브웨의 참여는 합당하다고 표명

1998년 9월 15일

수단은 200명의 수단군이 콩고정부의 카빌라를 지원하고 있다는 반군의 주장을 부인. 짐바브웨는 콩고에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콩고에 자국군을 주둔시킬 것이라 발표

1998년 9월 17일

콩고 정부는 1996∼1997 기간 중 카빌라의 지원을 받았던 르완다군이 후투난민을 대량 학살하였다고 발표. 우간다는 투치 제국을 건설하려한다는 설을 부인. 반군은 부룬디인 후투가 탄자니아 기지로부터 고마 공격에 가담하는 등 카빌라를 지원하고 있다고 발표. 2,000명의 르완다 후투가 카빌라군에 가담

1998년 9월 18일

반군은 마틸리(Matili)와 이시로(Isiro)를 점령

1998년 9월 21일

르완다는 콩고의 어떠한 공격도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 반군은 카미투가(Kamituga)를 점령

1998년 9월 29일

차드 정부, 내전 중인 수단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000명의 부대파견(반정부군은 2,000명 이상이 리비아군 항공기로 이동하였다고 발표). 콩고 정부군을 지원하는 국가는 앙고라, 나미비아, 지부티에 이어 4국으로 증가

1998년 10월 19일

만델라 남아공화국 대통령은 콩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우간다 대통령과 회동. 만델라는 르완다 부통령 폴 카가메(Paul Kagame), 나미비아 대통령 샘 누조마(Sam Nujoma), DRC 반군 지도자 어니스트 왐바 디아 왐바(Ernest Wamba dia Wamba)와의 회동도 계획

1998년 11월

앙골라군은 UNITA를 지원하기위해 콩고에 주둔하고 있는 자국군의 철군을 고려. 짐바브웨 정부는DRC 반군과 16명의 짐바브웨 방위군 포로 석방을 위한 교섭 개시
* 콩고반군 지도자 장-피에르 온데카네(JeanPierre Ondekane)와 126명의 군인 탈옥
* 잠비아 대통령은 12월 중순까지 콩고 내전의 정전을 위한 관련제국 정상회담을 주도
* 콩고 정부군은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에서 반군 60명을 사살했다고 발표. 반군들은 전 수상 보나드 콜레라스(Bornard Kolelas)를 추종

1998년 11월 5일

남아공 외무차관은 콩고 내분이 종식되지 않는 경우, 전 아프리카 전쟁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고 경고. 동시에 동 차관은 콩고 내전의 즉각적인 중지와 외국군의 철수를 강조

1998년 11월 28일

콩고 내전을 중재하기 위한 4개국 수뇌회의는 아난 UN 사무총장의 요청을 받아 들여 파리에서 회담을 갖고 전투의 즉각적인 정지에 합의. 또 12월 중 정전 합의문서에 서명할 것에도 의견 일치

1998년 12월 30일

반군은 게메나(Gemena) 지역 점령, 그바돌리트(Gbadolite) 공략. 콩고 민주공화국은 탄자니아군 퇴역자들을 규합하여 DRC 지역 내 전투에 투입하면서 앙골라 UNITA반군과 협상하려는 우간다를 비난

1999년 1월 2일

카빌라 콩고 대통령은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고립되어 있는 육군에 전하는 포위공격 단계를 발표

1999년 1월 3일

반군이 게메나 지역을 점령하자 정부군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병력을 전개

1999년 1월 5일

반군은 남부 키베(Kive) 지역의 모코보타(Mokobota)에서 민간인 대학살자로 비난받음. DRC는 UN이 아프리카 분쟁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비난, UN조사관을 초청

1999년 1월 10일

반격 개시

1999년 1월 14일

르완다 정부군과 부룬디 후투 반군 및 콩고민주공화국(DRC)의 카빌라 대통령을 지지하는 마이마이(Mai Mai) 비정규군, 부카부(Bukavu)를 점령하고 있는 DRC 반군에게 대규모 공세. 반군측은 이 공격에서 4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

1999년 1월

안드레 므왐바 카팡가(Andre Mwamba Kapanga) 유엔주재 콩고민주공화국 대사, 자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대규모 살육을 저지르는 이웃 우간다와 르완다에 대해 유엔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미온적인 태도를 벗어나 제재조치를 취해줄 것을 강력 요청

1999년 1월 18일

아프리카4국, 콩고분쟁 종식 평화협정 서명. 콩고, 차드, 우간다, 에리트리아 등 아프리카 4개국 대통령은 18일 가다피 리비아대통령의 중재로 콩고 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협정에 서명. 이 협정은 리비아 해안도시 서트에서 가다피의 주선으로 4개국 대통령이 이틀간 회담한 끝에 체결됐다. 회담에는 로랑 카빌라 콩고 대통령, 콩고의 동맹국인 차드 대통령 이드리스 데비, 콩고 반군 지원국인 우간다의 무세베니 대통령, 분쟁과 무관한 에리트리아의 아프웨르키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러나 콩고 반군은 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가다피는 협정 서명식 후 4개국 대통령들에게 "여러분은 오늘 아프리카 통합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말했다

1999년 1월 26일

DRC에 소속되어 있는 르완다군은 동맹관계에 있는 반군과 함께 우리라(Urira)를 공격

1999년 1월 27일

DRC 사태 논의를 위해 루사카에서 개최된 각료회담, 구체적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종료. 카빌라 대통령의 정부는 반군과의 협상에 참석하겠다던 약속을 깨고 불참

1999년 1월 28일

정부군 기는 카탕가(Katanga)에 있는 니윤주(Nyunzu)를 폭격, 시민 20명이 사망. DRC군 기와 전차는 리카티(Likati)를 공격,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사망

1999년 2월 6일

차드군은 적도지방의 절반가량을 점령하였다고 발표, 우간다는 적도지방에서 우간다군을 생포하였다는 차드의 주장을 부인

1999년 2월 19일

앙골라 정부는 르완다와 우간다가 중부 아프리카 지역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고 비난
* 반군들은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인 음부지-마이(MbujiMayi)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 지속. 북부지역에서 작전 중인 MCL 반군들은 음부지-마이와 루붐바시(Lubumbashi) 지역에서 활동 중인 RCD반군과 연대해 갈 것이라 발표. 반군들은 페파(Pepa)를 생포하고 킨두(Kindu) 지역에 대한 정부군의 공격을 격퇴. 수천 명의 난민과 800여명의 콩고 정부군들이 반군의 공격을 피해 잠비아로 피난

1999년 3월 16일

반군들은 이심바(Eshimba) 인근 지역에 대한 공격으로 150명의 짐바브웨군을 살해. 기독교 선교단은 반군이 카미티가(Kamitiga)에서 100여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 카빌라 콩고 대통령은 만약 르완다와 우간다군이 반군들의 콩고철수를 지원해 준다면 반군과의 정전을 수용할 용의가 있으며, 반군들이 전투를 중단하고 무장을 해제한다면, 그들이 민족적 논의에 동참하는 것도 용인할 의사가 있음을 발표

1999년 3월 23일

강한 외교적 압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콩고정부는 OAU가 반군과 선거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동의. 1대의 짐바브웨 미그(Mig)기가 카발로(Kabalo) 근처에서 추락. 수많은 정부군과 민간인들이 전쟁을 피해 잠비아로 피난, 인권단체들은 반군들이 남부 키부 전투에서 200여명의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발표

1999년 4월 7일

카탕가(Katanga)의 카쿠야(Kakuya)에서 격전

1999년 4월 9일

UN은 인정되지 않은 군대의 DRC 철수를 요구

1999년 4월 12일

반군들은 격전 끝에 카쿠야시 점령

1999년 4월 13일

반군들은 로자(Lodja)와 루베푸(Lubefu)를 점령. 르완다와 우간다 장성들은 점령지를 순회, 반군은 음부지-마이를 점령하기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발표

1999년 4월 17일

반군, 잠비아와의 평화대화 불참

1999년 4월 18일

리비아 지도자 가다피는 DRC지도자 카빌라와 우간다 대통령 무세베니간의 정전 교섭을 중재, 동 교섭에서 우간다는 자국군이 콩고로 파병하지 않았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군대를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
* 콩고 정세는 정부군과 우간다와 우간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군 간에 정전교섭이 추진되었지만, 르완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주요 반군 세력들의 거부로 리비아가 중재한 평화교섭은 실패. 고마에 주둔하고 있는 주요 반군 세력은 평화유지군을 적군으로 구성된 군대로 취급하겠다고 발표. 잠비아 역시 평화교섭을 거부

1999년 5월 8일

콩고 정부는 나이로비에 '민족대화 기구'의 설치 발표하였지만, 르완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군과 반정부 단체의 지도자인 치세케디(Tshisekedi)는 참가 거부. 콩고자유주의 운동(Congo Liberation Movement)은 4월 말 북서지역인 본두(Bondu), 카테케(Kateke), 그바돌리트(Gbadolite)를 점령. 차드는 분쟁지역에서 정전이 이루어지려면, 군대가 철수되고 카빌라 정부를 지원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
* 우간다와 르완다는 콩고분쟁 해결을 위한 탄자니아 정상회담 개최에 동의, 카빌라에 대한 양보에는 실패. 우간다 민주공화국 측의 부대들은 철군에 대비하여 반군 양성에 박차

1999년 5월 11일

한 대의 콩고 군용기가 고마를 폭격. 우간다와 르완다는 콩고에의 증원군 파견으로 비난 받음

1999년 5월 15일

CLM 반군은 부싱가(Businga)를 점령. 카빌라 콩고 대통령은 리비아에서 르완다의 부통령이자 실권자인 카가메와 회동. 카빌라는 반군과 평화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

1999년 5월 28일

르완다는 DRC와의 정전 발표. 우간다는 4월말 DRC와 정전협정에 서명

1999년 7월 13일

짐바브웨는 DRC주둔 자국군 10,000명 가운데 우선 2,000명을 철수시킬 계획을 준비

1999년 7월 15일

정전협정에 대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였지만, 수개 지역에서 충돌 발생

1999년 7월 16일

UN과 중앙아프리카 국가들은 DRC 반군에 대해 평화조성협정(Peace Making Arrangement)에 서명하도록 압력 행사를 지속하였지만, 성과 무

1999년 7월 22일

반군들은 평화조성협정에 서명하지는 않았지만, DRC와 동맹 세력, 그리고 반군 동맹들은 정전 이행을 위한 노력 지속

1999년 7월 28일

DRC를 지원하고 있는 짐바브웨군은 자원이 풍부한 DRC지역에서 영업활동이 불가능해지는 등 대금지불이 어렵게 되면서 위기에 직면. 짐바브웨 기업가들은 선적비를 지불하지 못함으로써 남아공화국 기업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보게 되었음. 짐바브웨는 군사비로 월 200만 달러를 지출하여왔으며, 이 자금은 DRC에서 조달

1999년 8월 1일

'콩고 해방 운동(The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CongoMLC)'은 정전협정에 서명

1999년 8월 3일

MLC군은 마칸자(Makanza)를 공격함으로써 정전협정을 위반

1999년 8월 11일

콩고(DRC)정부와 동맹조약(회원국은 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 콩고공화국)을 체결한 짐바브웨는 반군들이 동맹군인 이른바 남아프리카군(The Southern Africa ForcesSAF)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정전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선언

1999년 8월 12일

RCD는 내분 중에 있으며, 이것이 정전협정이 성사되지 않는 주요 원인임. RCD의 내분은 대부분의RCD 요원들이 그들의 지도자 어니스트 왐바 디아 왐바를 거부하면서 시작. 왐바는 RCD의 소규모 분파를 이끌고 있으며, 이들은 여전히 RCD로 호칭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RCD는 에밀리 일룬가(Emile Ilunga)에 의해 지도되고 있음. RCD 양파는 어느 누구도 RCD를 대표해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협정서명이 지연되고 있으며, 충돌도 지속되고 있음. 일룬가가 이끄는 대규모의 RCD는 고마 동부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르완다는 이를 지원. 한편, 왐바가 이끄는 소규모 RCD는 키상가니에 본거지를 두고 우간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음

1999년 8월 26일

DRC에서 활동 중인 일룬가가 이끄는 반군 그룹들은 정전협정 서명에 동의. RCD는 2개의 분파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우간다의 지원을 받는 대그룹이며, 나머지 하나는 르완다로부터 지원 받고 있는 소규모 RCD임. 한편, 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는 킨샤샤에 설치된 DRC 정부를 지원

1999년 8월 28일

남아공화국은 DRC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데 어떠한 요청도 수용하겠다고 발표. 한편 RCD의 한파를 이끌고 있는 비키마 카라하(Bizima Karaha)는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에게 DRC내전종식을 위한 정전협정에 서명하겠다고 밝힘

1999년 8월 31일

RCD는 DRC에서 전쟁종식을 위한 정전협정에 서명. 동 RCD는 정전협정을 거부해 온 DRC 최대의 분파였음

1999년 9월 9일

마이마이 부족의 한 부족장이 콩고군의 참모장 자리를 이양받음. 그간 마이마이 전사들은 RCD에 반대하는 주요세력인 투치의 적으로 간주되어 왔음

1999년 9월 16일

UN은 DRC내분으로 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수십만 명이 실종되었다고 추계. UNHCR은 탄자니아에 10만 명의 DRC 난민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

1999년 9월 21일

DRC 정부군 대변인은 DRC 반군과 이들을 지원하는 르완다인은 DRC의 다이아몬드 주산지인 음부지 마이를 습격할 것이라고 발표. 한편, 반군지도자들은 DRC 정부군이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10월 2일

우간다 정부는 UN에 대해 DRC 정전협정의 효력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한 조속히 평화유지군과 감시군을 파견할 것을 촉구

1999년 10월 3일

DRC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 우간다는 과거 모부투 정권하에서 반군 점령지역의 관리로 일한 경험이 있는 '범법 관리'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 그간, 모부투 지지자들은 DRC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에 가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

1999년 10월 4일

소말리아 정부는 카사이(Kasai) 지방의 카비나(Kabina) 외곽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13명의 반군을 사살했다고 발표. 한편, 르완다의 지지를 받고 있는 RCD 반군들은 DRC 중부지역에서 새로운 공격을 개시했다고 비난

1999년 10월 7일

르완다 육군과 RCD는 키갈리(Kigali) 근교 공격에서 후투 반군(르완다인) 2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

1999년 10월 9일

르완다군과 반군동맹은 카탕가에서 DRC 정부군을 공격

1999년 10월 27일

앙골라, DRC, 짐바브웨에 에이즈 만연. 특히, 짐바브웨 성인가운데 25%가 HIV 양성 환자로 추정

1999년 10월 28일

짐바브웨는 DRC 내전 개입비용으로 월 300만 달러를 지출하고 있지만, 개입 첫 연도의 6개월 동안에는 총 11억 6,600만 달러를 사용했다고 국제통화기금에 보고

1999년 10월 30일

30명의 마이마이 전사와 시민들이 DRC에서 발생한 충돌로 사망하였으며, 여기에는 부룬디인 후투 반군과 르완다인 후투 반군이 가담

1999년 11월 4일

반군인 콩고해방운동(MLC) 대변인은 DRC 정부군의 항공기가 동고(Dongo) 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

1999년 11월 9일

DRC 정부는 정부군이 에콰테르(Equateur)와 카사이(Kasai)지방에서 반군에 대한 공격을 중지했다고 발표

1999년 11월 12일

DRC 반군은 DRC 정부가 DRC의 중부지역과 동부지역에서 반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고 발표

1999년 11월 14일

DRC 정부는 최근 DRC 전역에 걸친 전투에서 6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여기에 우간다군 고위 간부가 포함되었다고 발표

1999년 11월 24일

RCD, 민주해방운동을 위한 콩고 연맹(The Congolese Rally for DemocracyLiberation Movement RCDML), 그리고 콩고 해방운동(MCL) 등 3개의 주요 DRC 반군들은 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재 회동.RCD와 RCDML은 각각 르완다와 우간다의 지지를 받고 있음

1999년 11월 25일

DRC는 카미나(Kamina)에 제7 여단을 창설. 주요 아프리카 및 DRC 지도자들은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에게 DRC 내전 중재를 촉구

1999년 11월 27일

한 통신은 이란이 DRC에 스커드B와 스커드C 미사일을 판매하였다고 보도. 이란은 이를 부인. RCDML 대변인은 외국군이 신형 무기와 탄약을 DRC정부에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12월 4일

3명의 러시안인 비행사들이 DRC의 그바돌리트에서 포로로 잡힘

1999년 12월 5일

MCL은 177명의 친정부군을 생포했으며, 이 전투에서 10명의 전사를 상실했다고 발표

1999년 12월 12일

DRC정부는 그루지아(Georgia)로부터 10대의 Su‐25 전투기를 구입

1999년 12월 13일

MCL은 은코니야(Nkonya) 근교에서 119명의 친정부군을 사살하고 130명을 생포했다고 발표. 또한, MCL은 은코니야에서 철군했다고 보도됨

1999년 12월 15일

MCL은 11월 중순 이후 900명에서 1000명의 친정부군을 사살했다고 발표

1999년 12월 22일

3개 주요 DRC 반군들은 연합전선 형성에 합의

1999년 12월 29일

UN은 DRC 정전을 재추진

마지막 수정일

  • 2012년 10월

각주

  1. 1 서방 뉴스들은 MLC 부대의 일부가 임폰도(Imfondo)시(市)에 있다고 보도. 10월 15일 MLC는 정부군이 카탕가주(州)에서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 MLC 대변인은 정부군, 인테르아함웨 민병대, 부룬디 후투반군(the Forces for the Defense of Democracy Faction)이 이 공격에 참가하였으며, 짐바브웨군은 지원포 사격을 했다고 주장. 이 공격은 카탕가주(州) 북부 폰타울라와 무소사(Musosa) 인근에서 발생하였음.

출처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한국국방연구원 한국국방연구원 로고표제어 전체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3759&cid=42147&categoryId=4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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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종식 결의안 부결

채택 최소 득표에 1표 모자라... 미국·호주 반대표 던져

14.12.31 13:21l최종 업데이트 14.12.31 13:21l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종식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유엔 공식 홈페이지는 31일(한국시각)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3년 이내에 종식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안보리 표결에 부쳤으나 찬성 8표, 반대 2표, 기권 5표로 채택에 필요한 최소 득표수 9표를 얻지 못해 부결됐다고 발표했다. 

팔레스타인은 결의안 제출 권한이 있는 유엔 회원국이 아닌 '비회원 옵서버 국가'이기 때문에 이날 결의안은 안보리에서 아랍권을 대표하는 요르단 정부가 대신 제출해 표결이 이뤄졌다.

디나 카와르 유엔 주재 요르단 대사는 "중동 분쟁의 핵심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공정한 해결은 국제사회에도 책임이 있다"며 "안보리가 이 결의안을 채택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결의안은 2017년까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종식하고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이전인 1967년 국경을 기준으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번 결의안은 표결 직전까지만 해도 채택에 필요한 최소 득표수인 9표를 얻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의안 지지 의사를 밝혔던 나이지리아가 기권으로 돌아서면서 1표가 부족해 부결됐다. 한국, 영국, 리투아니아, 르완다도 기권했다.

안보리 15개국 가운데 반대표를 던진 2개국은 미국과 호주다.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표결에 앞서 만약 결의안이 채택되더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만다 파워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결의안에 반대한 것은 현재 상태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평화는 힘든 타협을 거쳐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며 "오늘 결의안 투표가 분쟁 해결을 촉구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8369&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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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가 테러리스트? 괴물은 이스라엘"

[인터뷰]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냐옹·새라·기린

14.07.21 19:57l최종 업데이트 14.07.23 15:08l



"휴전협약 먼저 깬 건 이스라엘... 하마스가 또 도장 찍을 이유 없어"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노란색). 서쪽이 현재 공습이 벌어지는 가자지구로, 이스라엘에 의해 봉쇄된 상태다. ⓒ 위키피디아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제안했는데도 하마스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지금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2012년에도 하마스는 이집트의 중재로 이스라엘의 휴전안에 도장을 찍었는데, 그 조약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었습니다. 민간인 학살도 계속되었고요. 중재자인 이집트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일한 통로인 지하 터널을 다 폭파해버렸습니다.

협약을 먼저 깬 건 이스라엘 쪽인데 여기서 하마스가 또 다시 도장을 찍을 이유는 없는 거지요.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이 트위터에 '우리는 200명 희생자의 피를 헛되이 낭비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오늘 죽으나 서서히 죽어가나 똑같다'고 쓴 것을 봤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점령 때문에 팔레스타인도 협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냐옹)

'가해자'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상황이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이유 때문에 점령과 박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활동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냐옹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랍인은 다 테러리스트'라는 식으로 많이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 중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정부나 극단적인 사람들에 의해 낙인이 찍히고 살해 위협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이 일방적으로 점령당하는 상황"


새라씨도 "이스라엘에서는 쇼핑몰 같은 곳에서도 일상적으로 보안 검색을 하고,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계속 각인시킨다"며 "그런 식으로 계속 자국민들에게 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의 아이들도 이 '증오'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기린씨는 "어린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말했다.

"우리도 하마스의 일부 잘못된 정책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지 그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이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수록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괴물을 만들어가는 본질의 괴물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점령 정책이죠." (냐옹)

미국의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 교수는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후손임에도 극렬 유대인 단체의 압박을 가장 많이 받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뉴욕의 한 대학교에서 직장을 잃기도 했다.

그가 쓴 책 <홀로코스트 산업>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건이 미국 등지의 부유한 유대인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진짜 희생자들에게는 보상이 거의 가지 않았지만, 부유한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이용한 대중문화와 언론 보도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서방 언론의 보도도 마찬가지 문제를 보인다. 언론에서 팔레스타인을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로 묘사해 교묘하게 이스라엘의 침략을 정당화시킨다는 주장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한국 언론 또한, 국제 뉴스에서 서구 언론을 많이 참고하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는 반성도 나오고 있다. 냐옹씨는 "미디어에서 항상 이 문제를 양비론적으로 다루는 것 같다"고 했다.

"교전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죠. 사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동등한 위치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팔레스타인이 일방적으로 점령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언론은 둘이 '교전'하는 것처럼, 양쪽 다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양비론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활동가들은 또 다른 문제로 하마스에 대한 설명을 지적했다. 냐옹씨는 "하마스는 민중들이 투표로 뽑은 정당일 뿐 무장테러단체가 아닌데, 항상 '무장테러단체 하마스'와 같은 식으로 표현된다"고 지적했다.

새라씨도 "사람들이 하마스나 팔레스타인을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서방 언론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라며 "직접 현지에 다녀오신 분 이야기를 들으면, 하마스는 그냥 정부이며 (그곳에 소속된 사람들은) 공무원들일 뿐"이라고 했다. 활동가들은 "하마스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표현의 교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기사 전문 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5407&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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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들, 직접 보니 참혹합니다

[셀림의 팔레스타인 여행 다섯번째 이야기] 이스라엘과 전면전이란 표현, 동의 못해


#이야기 다섯,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면전?

현지 언론보도에 따르면, 현재 이곳의 긴장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상태이고, 연일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전투기가 폭격을 가해 7월 11일 기준으로 가자지구에서 102명이 사망하였고 6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300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어 2000여 명이 집이 없는 상태이다.

유엔인도주의업무 지원사무소(UN Office for the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에서 펴낸 긴급보고서에 따르면 현재까지 58명의 시민이 사망하였고 그 중 11명이 여성이고 21명이 아이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습이 계속되자 하마스 측에서도 로켓을 발사하여 이스라엘 거주지역에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세계 주요 언론은 현 상황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면전'식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보도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언론은 이번 사건이 주요한 원인을 이스라엘 십대 3명의 정착민 납치와 살해에 있고, 그 배후를 하마스로 단정하지만 하마스는 부인하였다. 소위 누구의 행위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착민 3명이 납치가 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집단 처벌을 지속하였다.

매일 밤 서안지구 전역을 급습하여 팔레스타인 13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장갑차와 지프가 왔을 때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3명이 살해된 채로 밝혀졌을 때 이스라엘이 최초로 한 행위는 하마스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가옥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역에 군인들을 투입하여 팔레스타인 여성, 아동,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 이스라엘 공습으로 생긴 가자지구의 커다란 포탄 흔적. ⓒ ISM

그런데 언론은 상호간의 분쟁, 전면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하마스 측에서 로켓을 발포하고 이에 대한 이스라엘 측 피해가 보고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하마스 측에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되는 무차별적 공습,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도로와 이동은 막혀서 어디로 도망 갈 곳도 없는 이들이 선택한 방식이 그거라면 무조건 비판만 할 수도 없다. 그리고 하마스의 로켓에 집중을 하면 팔레스타인 전체의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돌멩이를 던지고 로켓을 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두 집단을 비교하여 사태의 책임을 양분시키는 것은 사실과 진실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수십 년간의 점령으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의 가족들은 가족 중 1~2명은 사망하였고, 2~3명은 부상을 당했고, 3~4명은 감옥에 갇혀있거나 갇힌 적이 있다. 현 상황을 학살이라고 표현하면 동의하기 힘든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명백히 이스라엘에 의한 전쟁범죄이다. 그것도 2차 세계대전 시에 집단학살의 피해를 받았던 이스라엘에 의해서 말이다.   


기사 전문 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2851&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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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한번 쥐었다고 총살... 그곳이 팔레스타인"

[현장] 이스라엘 공습 참상 알린 '세이브 가자' 행사


"발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이 명심하셔야 할 점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현재 존재하는 이스라엘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첫 순서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설명한 PPS 한국인 회원 냐옹(33·여·활동명)씨는 이스라엘이 구약성경을 근거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 차지하려 하지만, 구약 속의 이스라엘은 서기 70년 로마인에 의해 없어졌고 현재의 이스라엘은 1949년 팔레스타인 주거지를 무력으로 빼앗아 세운 '전혀 다른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위한 억지 명분"이라며 "유대인이 성경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 이를 민족주의와 결합시킨 것"이라고 덧붙였다. 냐옹씨는 또 "이스라엘은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팔레스타인을 공습한다"며 "우익 정당이 보수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군을 향해) 주먹 한 번 쥐었다고 해서 체포되거나 그 자리에서 총살 당하는 소년도 있어요."

사메르씨가 생후 40일 된 신생아의 주검 사진을 보여주자 청중은 탄식을 쏟아냈다. 희생된 아기와 가족들은 모두 폭격으로 숨지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황이어서 아기는 묻히지도 못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사메르씨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이 이스라엘 군에 저항하다 체포됐고 일부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마지막 강연자로 등장한 언론인 김동문(52·자유기고가)씨는 한국 언론의 아랍 관련 보도가 대부분 피상적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 등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1990년 이후 10여 년간 요르단 등 중동지역에 거주했고, 이후에도 가자지구 등을 오가며 관련 기사를 <한겨레21> <미디어오늘> 등에 꾸준히 기고해 온 김씨는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한) 50일 동안 (현지에 대한) 심층취재를 하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보도한 한국 언론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일부 언론사가 아랍권 국가에 기자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현지어로 소통하지 못하고 영어할 줄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방문자'에 불과했다고 꼬집었다. 



몇 년 전 모로코를 다녀온 뒤 한국에 아랍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싶어 '카사자밀라'를 열었다는 김주희(33) 대표는 "다들 세계화를 말하면서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 죽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팔레스타인 문제는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주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사 전문 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8679&CMPT_C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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