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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대국 노르웨이!
직업교육과 언어교육도 체계적으로 시켜주고 지원금도 팍팍 주고..(요새 삭감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래서 인기가 있나 봄.
인구의 16.6%(6명 중 1명)가 난민출신인 나라라니.
그러고도 복지 좋고 치안 좋고 행복지수도 1위에 1인당 국민소득 96000달러라니.. ㄷㄷ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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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서향만당 21]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03.04.21 15:12l최종 업데이트 03.04.30 14:20l



홍세화 |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파리 생활을 시작했던 홍세화. 남민전 사건으로 뜻하지 않은 타국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 근 20년만에 귀국,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다시 서울땅을 밟은 지 23년, 그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0년 겨울 서울 신림동 어느 카페에서였다. 영구 귀국을 앞두고 잠시 귀국했을 때 있었던 강연회였는데, 그는 ‘사회귀족’이라는 새로운 말을 써가며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가 말하는 사회귀족의 의미가 그리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새로운 개념이었던데다가 그걸 이해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그로부터 2년 4개월이 흐른 지금, 카페 ‘미네르바의 부엉이’에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했던 ‘사회귀족’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에 대한 설명과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보는 책을 접했다. 전작들처럼 한겨레신문사를 통해 나온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 그것.

신문 칼럼이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등 그의 글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우리 현실을 프랑스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대안을 찾는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 점이 홍세화의 글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일텐데,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짚고 그 대안을 찾을 때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 등을 비교 대상으로 꼽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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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단순히 비교 대상만 프랑스로 바뀐 것은 아니다. 홍세화는 석박사 학위를 따러 유학 간 것도 아니요, 뭐 거창한 사업한답시고 유럽까지 간 것이 아니다.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발령으로 프랑스 땅을 밟았다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입국할 수 없어, 결국 원치 않은(?) 이국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마땅한 능력도 없고 프랑스어조차 능숙치 않았던 그였기에 결국 운전면허증 밖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머지 택시운전을 하며 빠리 시내를 누볐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한국에서는 소위 ‘KS마크(경기고+서울대)’를 따면 출세가 보장된다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는 그저 ‘또 한 명의 외국인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귀족, 그 ‘찬란한’ 이름이여 !

이 책이 나온 것은 지난 2002년 12월 말. 이미 넉달이나 지났다. “언제 한번 봐야지” 하면서도 짬을 내지 못하던 차에 책을 구입, 하룻밤 새 모두 읽어 버렸다. 짬이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던 순간이었다. 책을 읽는 데는 하룻밤으로 충분했지만 그의 생각을 곱씹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몇 곱절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 이 책에서 홍세화는 호남 차별이나 노동자 연대, 국가주의 교육 등 그야말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제 문제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사진은 홍세화의 비판 대상 중 하나인 <조선일보>.
ⓒ 조선일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은 전작들처럼 <조선일보>나 호남 차별, 노동자 연대, 국가주의 교육 등 그야말로 한국 사회의 제문제를 포괄하는 책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스펙트럼이 넓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듯도 하다. 그러나 찬찬히 책을 읽다보면 근저에 한국판 귀족 ‘사회귀족’의 온갖 추악한 폐습과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우리네 ‘사회성 없음’을 질타하고 있는 듯 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홍세화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부르디외가 말한 ‘국가귀족’이 있는 반면 한국에는 ‘사회귀족’이 있는데,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의 국가귀족은 국립행정학교(ENA) 출신들로 주로 정관계와 국영기업체의 장(長)을 일컫는 반면, 한국의 사회귀족은 말 그대로 정관계나 재계는 물론, 학계와 언론계, 문화예술계, 문단, 종교계 등 (홍세화에 의하면 뭘 지도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불리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범위도 범위지만 프랑스 국가귀족의 경우에는 주로 공공기관에 한정되어 있어 언론이나 학계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고 통칭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불리는 사회적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반면, 한국판 귀족은 그저 자기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부의 사회환원이나 부정부패 등에 대해 올곧은 소리를 내는 등의 ‘사회적 책무’는 그네들 사전에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귀족이란 신분이 종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는 경향마저 보인다는 데 대해 홍세화는 다시금 아연실색하고 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

그러나 택시운전사는 그저 힘없이 절망만 하지는 않는다. 사회귀족의 든든한 성채를 깨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교육을 통한 계몽이 필요하지만, 중단기적 방안으로서 풍자.고발 문화의 대중화와 실명 비판 강화, 그리고 일생 생활에서 ‘왜?’라는 물음을 갖자고 제안하고 있다. 



▲ 홍세화 /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한겨레신문사 / 2002 / 9,000원
ⓒ 한겨레신문사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안은 이미 각종 인터넷 매체나 일부 대학 교수 등에 의해 부족하나마 토대가 마련되어 가고 있다지만, 마지막 방안으로서의 “왜?”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오히려 우리네 부모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왜”라는 물음을 없애려 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가나다’도 떼지 못한 코흘리개에게 ‘ABC’를 외우게 하는 데 바쁘고, 하늘은 왜 파란지 함께 궁금해 하기보다는 “하늘은 원래부터 파래서 그럴거야!” 혹은 “그런 건 알아서 뭣해!”하는 핀잔이 먼저 나온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제기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어도 “빨리 학원이나 가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절망하진 말자. 우리 역사는 느리지만 그래도 도도히 흘러 발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해방 이후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는 못했지만 기나긴 군사정권기를 이겨냈고, 해방 반 세기만에 (김대중 정권의 공과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정권교체라는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도 맞이했다. 

이전에는 말도 꺼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인권이라는 가치가 요즈음에는 심심치 않게 장삼이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또 ‘조중동 카르텔’에 대항하는 각종 매체들이 생겨나고 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 역시 적지 않은 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금기로 통했던 “Why Not?” 혹은 “Why?"라는 질문이 서서히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홍세화, 그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단다. 그는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단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군인이라 하더라도 ‘나홀로 척탄병’ 역할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무기로 그 대열에 동참할 자원병, 누구인가.

Posted by 정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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