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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pochtimes.co.kr/2015/12/亞-100만인-파룬궁-박해-주도한-장쩌민-형사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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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스가 노를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클릭! 해외 페미니즘 2015/05/21 21:59 이프


-WHY YES CAN MEAN NO 




흔히 남성들한테 여성의 노(no)는 예스(Yes)를 의미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하면 데이트강간이라는 말도 있고 아내강간이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섹스와 강간 사이에는 복잡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CMC포럼에서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공연을 계기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기고문을 게재했다. 조단 보실예박의 기고문 “왜 예스가 노를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Why Yes Can Mean No)"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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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허락하는 것이 섹시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물론 거기에는 포인트가 없다. 그건 마치 강간을 범죄라고 말하지 않고 대신 그냥 좋지 않은 섹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허락은 의무사항”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에게 섹스는 허락을 받아야하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강간이라고 상기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 내가 있었다. 파티가 끝난 후 남자 기숙사에서 그리고 “괜찮아?(Is this ok?)"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법률적으로 다뤘다면 나는 ‘예스(yes)'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강제도 없었고 폭력적인 위협도 없었으며, 만취(글쎄, 어쨌든 아주 많이는 아니었다)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예스를 말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 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속으로는 ’노(No)'를 말하고 싶어 하면서 왜 ‘예스’라고 말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는지 누가 나에게 예스를 말하도록 가르쳤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종류의 페미니즘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도 나오지 않고 지저벨 같은 페미니스트 매체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페미니즘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내가 상처받을 때 나를 혼자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페미니스트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맘 속으로는 노를 의미했지만 예스라고 말했던 그 날 밤에 대해서 내린 결론이다. 



                                                           ▲왜 예스가 노인지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내 말은 우습게 들릴 수도 있다: 어떤 바보가 노를 의미하면서 예스라고 말하나?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도 정직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직하게 나에게 그것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문제들이 있다. 




다섯 살에 친척들은 내가 웅크리고 도망가더라도 내 뺨에 뽀뽀를 하곤 했다. 연약한 12살의 나이에 나는 학교에서 내 브래지어끈과 넓적다리가 남학생들의 시선을 끌기 때문에 교도소에 보내져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16세에 내 남자친구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그걸 좋아한다고 말하며 나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마침내 스무살의 나이에 이르러 파티가 끝나고 누군가의 방에 있는 나에게 ‘노(no)’는 겁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은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우리는 그 경험을 “강간문화에 의해 강간당하다(raped by rape culture)"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우리는 ‘노’를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를 기른 문화의 힘과 파워에 의해 모두 비자발적으로 ‘예스’를 말하고 만 것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방에 가버렸다는 책임감, 좋은 친구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 외로움,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갖지 않을거라는 걱정, 내가 ‘노’라고 해도 그들은 멈추지 않을거라는 두려움, 알콜의 영향, 관계가 재미있어지리라는 기대 등 등이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나 또는 나와 같은 수많은 다른 여성들에게도 허락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스가 언제나 예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여전히 “그렇지만 그녀는 ‘no'라고 말하지 않았어요”와 싸우고 있거나 혹은 강간이 늦은 밤 골목길에서나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강간은 허락받지 않은 상태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허락은 어린 시절 우리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파트너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부터 시작된다. 나는 아직 확실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그 답을 찾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노’를 말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no'를 찾기 원한다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유숙열 


http://blog.ohmynews.com/feminif/532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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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r-oreum.net/article.php?id=2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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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친미만을 강요하는 한국식 전체주의

리퍼트 기습사건과 한국사회

명숙
반미는 상상불가능한 사회

이번 사건에 대해 언론과 정치권이 내놓은 둘째로 많은 해석이 ‘한미 동맹에 대한 테러’이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한국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도 이 프레임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사건 다음날 대통령은 "이번에 범행을 저지른 사람의 반미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 등 극단적인 주장과 행동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대다수 우리 국민들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친미'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약소국을 침략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적 긴장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도 우리는 ‘친미’를 주장해야 하냐고. 한미동맹이라는 것이 그저 나라 간의 우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기본 전제로 한 것이라면 우리는 한미동맹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이 우선이라면 전쟁을 전제로 한 친미가 아니라, 평화를 기반으로 한 외교정책이 우리의 선택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은 국제경제와 정치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군사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일본 정부의 재무장에 대해서도 침묵한 채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를 서두르고 있다. 미사일방어체제(MD)는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의 핵무기가 미국에 떨어지기 전에 공중에서 요격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은 가까워서 저(低)고도 미사일로 충분한데도, 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제인 사드(THAAD)를 배치하겠다는 것은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해왔다. 얼마 전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 촉구를 민족주의로 치부하며 잊자고 망발을 한 이유도 한‧미‧일 군사공조를 성사시키고 싶어서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이 취해야하는 태도는 좀 더 주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 왕조가 명과 청 사이에서 사대주의를 취하거나, 구한말 열강들 사이에서 정부가 갈팡질팡하며 백성을 져버렸던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외교적‧군사적 관계는 무조건적인 ‘친미’가 필요한 게 아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친미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친미만을 강요하는 ‘전도된 전체주의’

자유민주주의는 곧 친미라는 정부의 접근은 셸던 월린의 책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떠올리게 한다. 월린은 미국의 역사와 부시 대통령의 집권과정과 정치를 분석하면서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명명했다. 9‧11테러 이후 반공이데올로기와 공포정치는 민주주의를 애국주의로 탈바꿈시켰고, 사영화(私營化)된 언론에 의해 시민들의 비판의식은 잠식되어 수동적인 시민들이 양산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치권력과 기업권력에 의한 ‘전도된 전체주의’로 나아갔다고 보았다. 그는 나치즘과는 다른 현대 미국사회의 전체주의 경향을 그렇게 표현했다. 지금 민주당 오바마가 집권했다고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미국은 IS 공습과 사드(THAAD) 배치 등 테러와의 전쟁을 강조하며 군수산업을 기반으로 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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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화병의 이유

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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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이제 몇 년 전인지 셈하기도 쉽지 않은 꽤 오래전 그때. 드디어 우리 학교에도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권고가 내려왔다. 반 아이들은 술렁거렸다. 왜 하필이면 우리부터야. 내년부터 입으면 안 되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을 쑥 내밀고 볼멘소리를 했다. 어떤 친구는 모두 다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게 마땅찮았고, 어떤 친구는 교복을 살 돈이 궁해 곤란했다. 나는 치마가 싫었다. 엄마가 입혀주는 옷만 유효했던 유치원 이전 시절에도 치마는 싫었다. 그래서 치마를 입을 때면 늘 받던 요구들(속옷이 보이지 않게 조신하게 앉으라거나, 나무 위나 정글짐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말라거나 하는)을 일부러 못 들은 체하며, 청개구리 짓을 했다. 치마만 입으면 짝다리를 짚었고, 철봉에 매달렸다. 그렇게 내 옷장에서 치마들은 사라져갔다. 그런데 엄마도 아닌 학교가 나에게 치마를 입히려고 하다니!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학생의 80% 이상이 찬성해야 교복을 시행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는 걸 알고서 우리는 작당을 시작했다. 반장이었던 나는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자체 투표 결과 교복을 찬성하는 친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입어도 그만, 안 입어도 그만인 친구들까지 포함해도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선생님을 설득할 궁리를 찾았다. 먼저 내가 모두의 의견을 수렴해, 말하자면 대표발의를 한 후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첨가하기로 했다. 80% 찬성은커녕 80%가 반대하는 일이니 우리 뜻대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렇게 이반결의(1학년 2반이었다)가 성사되었다.

드디어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교복점 사장이었는지, 교육청 직원이었는지 지금은 가물거리는 또 다른 어른이 함께였다. 교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만 하더라도 시골 중학교의 선생님에겐 범접치 못할 어떤 위계가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의사를 물었고, 나는 크게 팔을 올렸다. 선생님이 나를 지목하자, 나는 비장하게 일어나 발끝에 힘을 주고 서서 합의한 내용들을 읊었다. “우리 반의 대다수는 교복을 반대합니다. 일률적인 교복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놀이를 하거나 움직이기 불편하고, 보온 기능도 떨어지고, 한꺼번에 돈을 내야하는 부담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끝났고,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눈에 띄게 무서워진 표정의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셈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의견 없나? OO 말에 동의하나?”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이쯤에서 팔들이 쑥쑥 올라와 ‘동의합니다’를 외쳐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반 친구들은 꼼짝도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선생님이 “그럼 OO만 반대한다는 거지?”라고 다그쳐 물었을 때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나의 심장은 100m 전력질주를 막 끝낸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배신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교실 뒤쪽으로 걸어갔다. 어른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는 선생님의 꾸지람이 들렸지만, 이미 내 손은 교실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복도에 나서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며칠 후 교육청으로부터 50% 이상 찬성이면 교복을 시행한다는 새로운 공문이 내려왔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 한 명씩 따로 불러 찬반조사를 했다. 하지만 끝끝내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가 교복을 입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 일이 있는 후 나는(정확히 내 몸은) 이상해졌다. 갑자기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았고, 걸핏하면 체하기 일쑤였고, 정확히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명치가 아팠고, 밤에도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았고, 그래서 피곤했고, 만사가 귀찮았다. 반 아이들과 말도 하기 싫었고, 내 눈치를 보는 친구들이 짜증났다. 자꾸만 머리가 아팠고, 참기 힘든 이명이 들렸고,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엄마의 걱정은 늘어갔다. 읍내 의사들이 알아내지 못한 치료법을 찾아 엄마는 내 손을 끌고 시내의 병원을 찾았다. 병원 건물은 아주아주 오래되어 보였고, 그 안에는 건물만큼이나 아주아주 나이 든 의사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누워보라 앉아보라 하며 한동안 내 몸을 요리조리 살피던 의사 할아버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화병이네. 아이고 무슨.. 열네 살짜리가 어쩌다 화병이 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에게 아주 긴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진심 어린 측은지심으로 나를 위로했고,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다음 날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몇 명의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입을 떨어지지 않았다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가 자신들에게 화가 많이 나 있을까봐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고, 속에 있던 얘기들을 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교복을 입게 되었지만, 반 친구들과 나는 그것으로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몇 달간 쓰던 안경을 벗었고,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시킬 위장을 되찾았고, 두통과 이명 없이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화병은 씻은 듯이 나았...으면 좋았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게 만만한가. 그것은 단지 나의 첫 화병이었을 뿐.

지난 2월에 발표된 두 개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직장인 중 90% 이상이 화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화병의 원인으로 63.8%가 인간관계의 갈등을 꼽았다(취업포털 커리어 조사결과).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도 연간 11만 5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고 결과). 주목하게 되는 건 화병 환자의 60%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과 명절 끝에 화병 환자 수가 급증한다는 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의 특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관계의 갈등이 대개 소통의 부재에 기인함을 알고 있다. 휴대폰과 이메일, 메신저, 각양각색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까지. 우리는 원하는 언제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소통은 오리무중이고, 인간관계는 어렵기만 하고, 결국 화병이 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 친구들이 일부러 나를 괴롭게 할 요량으로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화병이 난 나의 입장이다. 그 달라지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들을 곱씹어 보지 않은 채, 달라지지 않은 결과만을 탓하는 것으론 화병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 나의 목소리가 내가 원하는 곳에 가 닿지 않을 때, 혹은 애초에 그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때의 절망과 화가 만들어내는 병은 결국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대만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제 엄마만 내 편이면 마음 든든해지던 열네 살의 내가 아니니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을 결과를 깨어 부술 ‘진짜’ 소통을 찾아 떠나는 일. 물론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대통령도 못하는 걸 시작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덧붙이는 글
난새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
인권오름 제 428 호 [기사입력] 2015년 03월 04일 18: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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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과거를 바로 볼 때 시작한다

훈창
미국 국무부 웬디 셔먼 정무차관이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에서 연설한 내용이 한국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동북아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정치지도자도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는 셔먼 차관의 연설 이후 국내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며 정부에 엄중대응을 촉구했고 시민사회단체는 미국에 과거사 발언에 대한 사과를 촉구했다.

셔먼 차관의 연설 이후 한국 정부는 외교부 정례브리핑을 통해 미국의 정책 변화가 아니라며 서둘러 해명했고,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이 “특정인 혹은 국가를 의도한 말이 아니다”고 해명했지만 한국사회의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급기야 3월 5일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을 당했으며, 워싱턴타임스는 미 관계자들이 셔먼 차관의 발언이 영향을 끼쳤는지를 포함한 공격 이유를 탐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북아시아의 역사, 잊힐 수 없는 민중들의 고통

물론 민족주의가 동북아시아 평화에 영향을 미친 점은 사실이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근대 역사에서 각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전쟁과 전후 처리의 여파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한반도는 식민지배 하에서 위안부, 학살과 착취의 고통을 겪었으며, 중국 또한 남경대학살 등 민중들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전승국들에 의해 민중들의 고통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일본은 호시탐탐 다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민중들이 그때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고, 때로는 정치지도자에 의해 현재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지도자에 의한 민족주의의 발현이 지금을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과거이자 현재인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친일청산조차 이루지 못했으며,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따라 일본과 '미래'를 함께 할 관계를 요구 받는 상황에서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와 살아 있는 피해자의 존재는 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위 사진: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위안부’들(출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또한 셔먼 차관이 "한국인들과 특별히 중국인들은 일본의 국방정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일본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위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논쟁을 벌여왔다 역사책의 내용이나 심지어는 바다의 이름(동해-일본해)에 대해서도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이해할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는 연설은 위와 같은 갈등이 현재 동북아시아에 어떤 위협을 주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일본의 아베 정부는 전후 만들어진 일본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특히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여 자위대를 군대로 격상시키고, 교전권을 확보하려 한다. 일본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자위대를 파견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받으려 하는 모습에 동북아시아의 긴장 기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이나 동해-일본해 명칭에 대한 갈등은 이와 같은 일본의 대외 팽창정책에 대한 긴장감이기도 하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 침략전쟁을 축소시키고, 군위안부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인 것처럼 실리는 문제는 단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인식과 평화에 대한 문제이다. 과거의 침략전쟁에 대해 제대로 반성과 사과,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조차 하지 않은 일본이 다시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할 때 침략전쟁의 피해를 공유하고 있는 국가와 민중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웬디 셔먼의 발언이 의미하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

동북아시아는 미국에 있어 중동과 함께 주요 위협지역이다. 미국을 경제적·군사적으로 위협하며 부상하고 있는 중국, 푸틴 정권 하에서 다시 위협국으로 부상한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 지역은 어떤 순간에 미국에 직접적 위험지역으로 바뀔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동북아시아 전략에 최대 과제는 중국을 견제하는 일이다. 미국이 2013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식 지지하고 일본 재군사화에 대해 눈을 감은 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일본을 끌어들인 맥락, 싸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추진 등은 모두 미국의 이익을 위함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을 자극해서 얻을 이익이 없는 한국은 미국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거부했으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 행정부는 한·미·일 관계 개선이 필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와 같은 연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즉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중국을 견제하며 얻는 미국의 평화일 뿐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아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바란다며, 미사일을 배치하고 일본의 군사력을 높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온전한 반성 없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없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이 맞대고 있는 동북아시아는 근대사회 이후 언제나 전시체제였다. 일본 제국주의 팽창 이후 한반도는 침략과 식민시대를 거쳤으며,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전쟁을 치렀다. 해방 후 한반도는 한국전쟁을 거쳐 수십 만의 민간인이 사망하였으며, 한국 전쟁후 미·소 냉전의 최전방에 있었다. 그리고 북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국가간의 갈등은 여전히 이 지역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이 무엇을 하였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셔면 차관의 연설은 자신들이 이 문제에 있어 오직 중재자의 역할을 지닌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미국은 주요 행위 주체였다.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전쟁 패전국인 일본이 아닌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였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 전쟁 피해당사국인 남·북 정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배제되었고, 결국 일본과 아시아 국가간의 피해배상 문제를 강대국들이 결정하였다. 결국 지금의 한·중·일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갈등은 단지 각국의 정치지도자가 만들어낸 갈등이 아닌, 전후 냉전체제에서 보여준 미국의 행위가 함께 만들어낸 문제이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누구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하는건 당연하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지역은 100년의 시간동안 평화보다 위협과 공포의 시절을 살아왔다. 이와 같은 위협과 공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확산되었는지 우리는 봐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사회의 과오 또한 살펴야 한다. 한일협정을 통해 민간인 피해에 대한 보상과 사과조차 받지 않고, 민족주의를 활용해 국가주의를 강화할 뿐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은 한국 정부와 식민지 시대를 옹호하는 이들은 위안부 생존자가 53명만이 남아있는 지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훈창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http://hr-oreum.net/article.php?id=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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